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① 스러지지 않는 '작은 거인'

중국 개혁ㆍ개방의 총설계사로 추앙받는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00 주년을 앞두고 중국 각계에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이 '작은 거인'을 그의 생애와 현대 중국건설에 미친 영향 등을 중심으로 5회분을 송고하니 제작에 참고 바랍니다. / 편집자주

덩샤오핑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4년 8월 22일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에서 농사를 짓는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중국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고 쑨원(孫文)이 결성한 중국동맹회에 의해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는 등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그는 16세이던 1918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의 대학에서 수학한 뒤 귀국, 1927년 광시(廣西)성에서 공산당 지하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민중폭동을 주도했고 농공홍군(農工紅軍) 제7군과 제8군을 창설, 혁명거점을 확보하는 등 타고난 혁명가적 기질을 발휘한 뒤 1934년 반주류였던 마오쩌둥( 毛澤東)을 지지하며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해 그의 유력한 참모로 성장했다.

1949년에는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휘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이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1952년), 당 중앙위원회 비서장(1954년), 정치국 위원(1955년)을 거쳐 1973년 국무원 부총리가 됐으나 마오쩌둥의 미움을 사서 권좌에서 물러났다가 1977년 복귀해 화궈펑(華國鋒)과의 권력투쟁 끝에 1978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다.

덩은 이 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해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했다. 기업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인재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의 정책을 통해 중국 경제를 활성화한 것이다.

1989년 11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난 뒤 임종 순간까지도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던 그의 인생역정이 그렇다고 탄탄대로였던 것만은 아니다.

'3하3상(三下三上)'으로 불리는 세 차례의 실각은 그에게 '오뚝이(不倒翁)'라는 별명을 얻게 했고 1989년 6월 4일 톈안먼(天安門)사태로 최대의 위기를 맞는 등 시련과 도전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1933년 공산당 국제파에 의해 마오쩌둥파(派)로 몰려 광시성 당 서기직에서 해직되는 첫 실각을 경험했고 문화혁명 초기인 1966년에는 이른바 '흑묘백묘론( 黑猫白猫論)'으로 표현되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창했다가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고 정 무원 부총리직에서 밀려났다.

70년대 들어 국무원 부총리에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군 총참모장을 겸하게 된 그는 문화혁명의 급진노선을 비판하다 4인방으로 불리는 문혁파로부터 반격을 받고 1976년 4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추모시위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돼 세 번째 실각의 아픔을 맛본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체포 이후 1977년 3월 모든 직책을 회복한 덩은 마오쩌둥 사망 이후 주석직을 수행해 온 화궈펑과 대립했으나 1978년 12월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덩은 집권 이후 10년에 걸친 문화혁명으로 피폐해진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새로운 궤도에 진입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사회주의와 개혁.개방 추진에서 오는 이념적 갈등을 경제건설이라는 하나의 중심점 아래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고수 및 개혁.개방 유지라는 2개의 지도노선을 채택 해 해소했다.

외교면에서는 대만과의 관계를 '1국2체제'로 정리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대만과 국교를 맺은 국가와는 단교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지만 가장 고마워하는 지도자는 덩샤오핑'이란 평가처럼 중국 경제발전의 영웅인 그는 검소한 정치인으로도 유명하다.

사후 유품을 정리하던 아내와 딸들이 구멍이 뚫리지 않은 옷이 단 한 벌도 없는 것을 보고 목놓아 울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이런 그에게 톈안먼사태는 씻을 수 없는 최대 오점으로 남아 있다.

경제논리로 정치문제를 극복하려던 그의 중국식 사회주의가 정치 및 경제개혁의 불균형으로 인해 분출된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대신 유혈 진압함으로써 서방세계의 거센 비난과 제재를 받았다.

그는 사태 수습 후에도 정치안정을 위해 학생, 지식인 등 민주화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이는 등 바람직하지 못한 정책을 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1970년대 말 정권을 잡은 이래 중국식 사회주의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져왔고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문화혁명 등 중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함께 한 작은 거인 덩샤오핑.

그가 사망한 지 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의 뇌리에 ' 위대한 별'로 기억되고 있다.

어쨌든 그는 떠났고 중국은 흔들림 없이 개혁.개방노선을 걷고 있다. 그러나 당료와 관료의 부정과 부패, 황금만능주의와 도덕적 타락, 빈부격차의 심화 등 경제성장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늘은 점차 깊어만 가고 있어 환부를 수술하는 작업이 그의 뒤를 이은 중국 지도부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박기성 특파원

② 덩샤오핑과 한반도..말.말.말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 은 한반도와 관련해서도 음미해볼 만한 말들을 많이 남겼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맹방이었던 북한에게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과감하게 사회주의식 시장경제를 도입할 것을 기회있을 때마다 촉구했고,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할 때는 실리주의자다운 명언을 쏟아냈다.

▲ "미국, 일본과 무역이나 스포츠, 기자교류 등을 활발히 하면 한반도 평화통일 분위기 마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1979년 4월23일 오전 베이징(北京)을 찾은 김일성(金日成) 북한주석에게 전한 말이다. 덩샤오핑은 앞서 20일 오전에도 회의를 갖고 "김주석이 주창한 조선의 자주.평화 통일 방안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 내용은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이 최근 펴낸 덩샤오핑 연보에 수록돼있다. 연보에 따르면 덩샤오핑과 김일성 주석은 모두 11차례 만났다.

▲ "중국과 조선은 특수한 관계다"= 1981년 1월12일 북한 정무원 총리 이종옥(李 鍾玉)과 베이징에서 만난 자리에서.

▲ "분열돼있는 1개 국가의 상태는 빨리 해소돼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 통일은 10년안에 이뤄질 수 없으며, 100년만에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점진적으로 접근해 야 한다"= 1981년 5월3일 중국을 방문한 중일우호협회 일본측 대표단과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덩샤오핑은 신중한 접근을 강조하면서 "(김주석 이 제창한) 연방형태의 통일은 남북 쌍방사회의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서 통일을 추진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반대한다"고 말해 일본의 우경화 행태를 비난하기도 했다.

▲ "당내에 노인네들이 너무 많다. 젊은 인재들이 우리를 대체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임무이다"= 1983년 6월11일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金正日)을 만나 혁명세대의 교체를 언급했다.

▲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다...통일은 군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1987년 5 월22일 김 주석과 톈진(天津)에서 만나서 세대교체와 함께 남북 통일문제를 언급하면서.

▲ "이제 개혁.개방해야 한다. 김 주석은 선전에 가보았는가. 다음 기회에 꼭 가보길 희망한다. 선전에서는 이제 기술력이 좋은 제품이 생산돼 국제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1987년 5월24일 다시 김 주석과 만나 북한의 개혁을 촉구했다. 특히 선전 등 경제개발특구를 직접 방문하길 권유했다.

▲ "중국과 북한은 피로 맺어진 사이이다" "중국은 남조선에 의한 북침도, 북측에 의한 남침도 찬성하지 않는다"= 1987년 6월4일 일본 공명당 대표단을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면서 전쟁에 의한 통일에 반대했다.

"서울올림픽 참가문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에 따를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당시 민감한 현안이었던 서울 올림픽과 관련해서도 발언을 이어갔다. 이 말은 암시적으로 중국의 참가를 시사했다.

결국 서울 올림픽에 중국 대표팀이 참가하자 김 주석은 그 해에는 아예 중국을 찾지 않았고 1992년 한.중수교를 앞둔 1991년 10월 덩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중국 발걸음을 끊었다.

▲ "경제방면에서 개혁을 해야한다. 인민생활의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하지만) 미국식이나 서방식 민주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1991년 10월5일 김일성 주석과 마지막으로 만나서 사회주의식 개혁.개방의 길을 논의했다. 이른바 `정.경분리'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개혁.개방의 원칙을 분명히했다.

▲ "한.중수교는 중국에 유익무해(有益無害)하다"=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중국 의 외교부장이었던 첸치천(錢其琛) 전 중국 외교담당 부총리는 최근 회고록에서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덩샤오핑의 발언을 소개했다. 덩은 한중관계 정상화에 줄곧 많 은 관심을 쏟았다고 첸 전부총리는 강조했다.

1985년 4월 덩은 한중관계를 언급하면서 "중.한관계 발전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고 말했다. 돈을 벌수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 장점이 있으며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기 때문이었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란 실용주의적 이론으로 중국식 시장경제 를 주창한 덩의 현실주의적 시각이 잘 엿보인다.

첸 전 총리는 1988년 5월부터 9월까지 외국인사를 만날 때마다 덩샤오핑이 "중국으로서는 한국과의 관계발전은 이익만 있고 손해는 전혀 없다"고 거듭말했다고 전 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양국에 모두 이롭고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에 유리하 다는 말이다.

이우탁특파원

③ '샤오핑 동지, 안녕'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세상을 떠난 지 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오는 22일 그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과 원자바오 (溫家寶) 총리가 그의 생가가 있는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를 방문했고 장쩌민( 江澤民) 당 중앙군사위 주석은 최근 제막한 덩샤오핑 흉상에 친필을 남겼다.

중국의 각 언론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덩샤오핑 특집 사이트를 만들어 그의 어록 과 사진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고 인민일보는 네티즌들을 위한 사이버 헌화코너까지 만들어 놓았다.

중국 국가박물관 안에 최근 개막한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실에는 220 여점의 사진 및 그림과 50여건의 문서, 140여점의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전시실 한 편에는 그가 살던 집안의 사무실과 회의실이 원형 그대로 재현돼 있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샤오핑 동지, 안녕' 이 상영된다.

국영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그동안 덩샤오핑에 관한 책이 100종 이상 출간됐고 영상물도 60점 이상 만들어졌다.

중국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은 이달 초 그의 행적과 어록을 연대순으로 담은 '덩샤오핑 연보(1975~97)'를 출간했고 국제문화출판공사는 300여점의 사진을 곁들여 그의 일대기를 그린 '세기의 인물 샤오핑(世紀小平)'을 16일 펴냈다.

저장(浙江)성 당사(黨史)연구실이 펴낸 화보집 '저장에서의 덩샤오핑'이 100주년 기념일 하루 전에 출간되는 등 중앙 뿐 아니라 지방정부도 덩을 기념하는 출판물을 앞다퉈 제작하고 있다.

중국 국영 CCTV와 지방 TV방송국들은 다큐멘터리 '샤오핑 동지, 안녕'과 '덩샤 오핑 1928'를 비롯, 덩의 생애와 시장개방이 시작된 1978년에 관한 각종 영상물을 특집으로 방영할 예정이다.

통일전선에서 함께 투쟁했던 각계의 거물들이 16일 그의 업적을 회고하는 좌담회를 열었고 전국여성연합과 교육계 인사들도 이날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를 가졌다.

그런가 하면 영국 버밍엄 국제전람센터에서 16일부터 기념서화전이 시작되는 등 그 열기가 해외의 화교단체에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지난해 '혁명의 국부' 마오쩌둥(毛澤東) 탄생 11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중국 정부는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거국적으로 가질 계획이다.

기념식은 당 중앙위, 국무원, 중앙군사위, 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인민정치협상 회의가 공동 주최하며, 이 자리에서 중앙 지도부가 중대 연설을 한다.

당 중앙위 선전부.정책연구실.당교ㆍ당사연구실ㆍ문헌연구실, 교육부, 사회과학 원,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등 당ㆍ정ㆍ군 관련 기관들은 기념일을 전후한 21~24일 덩샤오핑 사상 토론회를 갖고 기념식 전야인 21일에는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덩의 고향인 광안현에서도 20일부터 22일까지 덩샤오핑 기념관 개관식 등 다채 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관련 행사가 대부분 정부기관 주도로 이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덩이 일반인들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생가에는 20여일 전부터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고 주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마련된 덩샤오핑 특집코너를 방문하는 네티즌이 연일 폭주하고 있다.

관영 신화통신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그가 아직도 많은 중국 인민들의 기억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화통신의 인터넷 사이트 신화망(新華網)이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5천541명의 응답자 가운데 67.6%가 덩샤오핑의 일생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답했고 45.2%는 그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밝혔다.

덩을 추앙하는 네티즌들은 그가 나라를 이론논쟁 속에서 정체되도록 방치하지 않고 중국인들의 정신을 해방시켰고 창의성을 발현시켰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박기성 특파원

④ `鄧이론' 약발 지속될까

중국 경제개혁의 아버지로 불리는 덩샤오핑( 鄧小平)이 생전에 밝힌 각종 이론과 사상은 앞으로 상당 기간 여러 방면에서 계속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지도부와 학자들은 1997년 사망한 덩샤오핑이 제시한 개혁ㆍ개방 이론을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밝게 비춰주는 영원한 등대로 평가하고 있다.

덩샤오핑 이론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을 이어받아 중국을 계획경제에서 새로운 시장경제로 이끈 설계도로 오늘날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덩샤오핑 이론이 최근 변화된 현실을 어떻게 반영할 것이며 중국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나갈지에 대한 우려가 점점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이다.

주쑹화(朱松華) 중국 외교부 주홍콩 특파원공서 2등비서는 "중국이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는 "특히 확대되고 있는 빈부격차와 기존 가치관의 몰락, 이로 인한 사회 불안정 문제가 앞으로 새 지도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는 성장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 성장의 속도를 조절하고 인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균형 발전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江澤民)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3개 대표이론'에 이어 제4세대 지도부가 제시하는 발전 전략은 이른바 `과학적 발전관'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과학적 발전관은 도농, 계층, 지역간 소득격차를 해소하고 경제발전을 중시하되 사회와의 조화로운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전문가들은 "후진타오 주석의 발전 전략은 덩샤오핑 이론으로부터의 궤도수정이 아니라 덩샤오핑 이론을 보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지난 15일 덩샤오핑의 고향인 쓰촨(四川)성을 방문한 자리에서 인민의 복지와 생활수준 향상을 목표로 제시한 덩샤오핑 이론을 소개했다.

그는 이어 당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면서 인민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을 이행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라며 당 간부들을 크게 꾸짖었다.

중국 정부가 고심하고 있는 것은 경제 성장이 정치적 변화에 대한 욕구를 감소 시킬 것으로 기대했지만 빈부격차 확대라는 또 다른 모순을 잉태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중국 전문가들은 경제가 지금과 같은 초고속성장을 거듭하게 되면 경제수준에 걸맞은 정치개혁과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따라서 중국 지도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라도 일어나 경제개혁과 성장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6ㆍ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이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 돌연사 직후 발생했다"면서 "지도자의 사망은 정치적 전환점이 된다"고 말했다.

이들은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가 사망할 경우 정치 개혁과 6ㆍ4사태 재평가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홍콩 주재 서방 외교관들은 "주민들의 민주화와 정치개혁 요구를 수렴해 사회안정을 이룩하며 덩샤오핑 이론을 실천하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그러나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는 인민들로부터 개혁ㆍ개방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덩샤오핑 사상을 절대 저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권영석 특파원

⑤ 시장경제 철학 `흑묘백묘론'

"고양이가 검든 희든 무슨 상관인가,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

중국 개혁ㆍ개방의 총설계사로 중국의 오늘을 있게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유명 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는 중국식 시장경제의 탄생을 잉태한 철학이 담겨있 다.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과감한 실용주의자였던 덩샤오핑은 1979년 미국 방문을 마친 뒤 "중국을 발전시키는 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건 공산주의 경제체제건 관계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바로 흑묘백묘론의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선부론(先富論:부유할 수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과 함께 오늘날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을 있게한 흑묘백묘론은 원래 쓰촨(四川)지방의 속담인 `흑묘 황묘(黑猫黃猫)'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공산혁명 성공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덩샤오핑의 운명은 `흑묘백묘'와 함께 했다. 그는 1960년대초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류샤오치 (劉少奇)와 함께 흑묘백묘를 거론하며 실용주의적 노선을 제시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인해 흑묘백묘 는 실현되지 못하고, 덩샤오핑도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 후 홍위병이 설치던 광풍 속에서 덩샤오핑은 남부 장시(江西)성에 있는 트랙터 수리 공장으로 하방(下放)되는 시련의 시절을 보내야했다.

하지만 `오뚝이(不倒翁)'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새로운 중국의 미래를 다시 흑묘백묘론에 담아 설파했다.

덩샤오핑은 1987년 2월 중앙부서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왜 시장을 말하면 자본주의이고, 계획을 말하면 사회주의가 되는가. 계획과 시장은 모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좋다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 시장 이런 것들을 사회주의에 이용하면 사회주의인 것이고, 자본 주의를 위해 이용하면 자본주의인 것이다"

흑묘백묘론에는 철저한 정경분리 원칙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정치와 경제체제를 분리한 채 경제분야에만 실리원칙을 적용한다는 것. 정치체제는 공산주의를 유지하고 경제분야에만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른바 중국식 시장경제체제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혹은 자본주의)는 공산당의 철저한 계획과 배려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안전장치가 확실하게 마련된 개혁이라는 점에서 동 유럽의 그것과 근본부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덩샤오핑은 1985년 8월 핵심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원칙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길을 가자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한다."

사회주의 중국 인민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실리적(또 는 자본주의적) 인식을 심어준 그가 여전히 `죽은 뒤에도 중국을 통치한다'고 얘기 되는 것은 현재의 중국이 그의 설계도면대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우탁 특파원

(연합뉴스 2004-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