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확실한 미래를 위하여

지난 6월 남한의 초등학생들이 백두산에 올랐다. 분단 이래 초유의 행사에 텔레비전 방송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물었다.

"백두산 느낌이 어때요?"

"시시해요."

너저분한 돌무지의 산정에서 '본 대로' 털어놓은 솔직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좀 덜 솔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의 터를 잡고, 고구려 선조들이 겨레의 기상을 펼친 곳이라는 '배운 대로'의 대답이 뒤따르기를 바란 셈이다. 결국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거나, 가르쳤어도 충분히 느끼도록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나라니 겨레니 하는 말만 들어도 몸에 닭살이 돋는 사람들이 있고, 영어 같은 '세계 시민' 교육과 달리 국사 공부 따위는 시대 착오라고 거품을 무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개인의 성향이기에 앞서 사회 추세가 그렇게 몰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훔쳐가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의 뇌리에 입력된 백두산의 높이는 2744m다. 그러나 백두산정 장군봉 '지진점'에 기록된 높이는 2750m였다. 동아출판사의 '세계대백과사전'은 앞의 수치를, 통일부의 '북한방문 길라잡이'는 뒤의 수치를 취하고 있다. 이런 오류의 시정은 별 문제가 아니지만, 시정이 만만찮은 별 문제도 있다. 연전에 중국 쪽으로 백두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들의 주장으로는 동북부의 비류봉(沸流峰)에서 남서부의 마천우(麻天隅)를 직선으로 잇는 천지의 4분의 3이 중국 영토였다. 그러나 이번에 들은 안내원 동무의 설명으로는 천지의 3분의 2가 조선 영토였다. 어떤 수학자가 와도 4분의 3에 3분의 2를 더하면 1이 넘고, 어떤 지리학자도 4분의 3과 3분의 2를 함께 만족시킬 국경을 그을 수 없다.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는 1712년 설치 당시부터 말썽이었다. 조선 대표는 산정에 오르지도 않은 채 청국 대표가 병사봉-오늘의 장군봉-에서 남동쪽으로 4㎞나 떨어진 표고 2200m 지점에 일방적으로 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천지는 완전히 저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은 그 비문에 연연하지 않았다. 항일 투쟁에 헌신한 조선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설립을 허용했으며, 거기서는 조선말과 한글 사용이 의무적이고 중국말과 한자 사용에 우선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역시 조선을 핍박한 중국 과거사를 거론하며 조상을 대신해서 사과했다. 사회주의 중국에는 그래도 이런 대의가 있었으나 이제 시대와 인물이 바뀌었다.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은 혁명 1세대 지도자들이 조각한 '역사 공정'에 대한 이탈이고 배반이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합류하면서 내보일 중화주의 야심을 경계해야 했는데, 우리는 저들의 사회주의 청산에만 환호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아시아 역사 교과서' 편찬 계획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부핑(步平) 부소장은 한국.중국.일본의 교사와 역사학자 30여명이 공동으로 집필한 중학교 역사 부교재가 내년 5월 3국에서 동시에 발행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마침 그 선례가 있으니, 유럽 공동의 역사 교과서로 통하는 '새 유럽의 역사'(까치.1995)가 그것이다. 12개국의 12필자를 대표한 프랑스인이자 영국인인 프레데리크 들루슈는 "어느 한 민족에 완전히 속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영국과 프랑스의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수상쩍은 존재가 되곤 했다. 백년전쟁이라든가…나폴레옹 전쟁에서 나는 어느 편을 들어야 했던 것일까"라고 편자의 고민을 술회했다. 그러고는 "신이 아무리 전능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가를 창조했다"는 어느 작가의 말을 인용했다.

역사는 무엇보다 '느낀 대로'의 문제다. 백두산에서 돌무더기나 보고, 국사 시간에 단군 할아버지만 외워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느껴야 한다. 워털루 전투가 영국 사가에게는 영광의 기록이지만 프랑스 사가한테는 아무래도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그 태생적 한계를 피할 수 없다면, 과거사 논쟁을 쓸데없이(!) 만드는 길이 있다. 유고의 격언대로 "절대로 확실한 것은 미래뿐이다. 과거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쓸 만하면 자꾸 과거를 들추지 않을 것이다.

(중앙일보 / 정운영 논설위원 2004-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