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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중국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광복의 달이다.
외환 위기 때보다 더 극심하다는 불황과 살인적인 더위가 조성한 무기력한 분위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광복의 참뜻에 배치되는 잿빛 구름이
한반도 상공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은 일말의 해결 기미도 없이 우리를 분노와 좌절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2002년 고구려를 중국 소수 민족의 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하면서 일기 시작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고구려사 왜곡은,
기실 8년 전부터 중국
중앙정부가 무려 3조원을 들여 펼쳐 오고 있는 야심찬 프로젝트이다.
당초 동북지방의 연구단체 중심으로 추진되어 온 작업을 중앙의 사회과학원이 접수해 추진해 오고 있다는 점만 봐도 중국 정부가 얼마나 다부지게
마음먹고 이를 추진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의 주도면밀한 작업에 대해 우리가 해 온 대응이다.
중국이 중앙정부 주도 아래 공작을 진행해 오면서 중국 내 고구려 문화재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해 고구려사 왜곡을 더욱 고조시키는
동안, 우리 쪽에서 취한 조치는 고구려연구회나 고구려연구재단 등 민간단체의 힘겹고 눈물겨운 투쟁이 고작이었다.
고구려 역사 왜곡이 사회적 관심의 초점이 되고,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중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할 때도 우리
정부는 ‘조용한 외교’라는 모호한 용어로 애써 개입을 회피했다.
우리 정부의 신사적인(?) 태도를 만만하게 보았는지 중국의 역사 왜곡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정부가 문제를 제기하자 중국의 횡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민간 차원의 해결을 거론하던 중국은,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를 삭제한 데 대해 우리 정부가 항의하자 아예 삼국 시대와 고려,
조선
등을 모두 삭제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만 남겨놓는 폭거를 자행하기까지 했다.
중국의 횡포에 대해 갖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고 이에 대한 대책도 만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어떻게 대접해 왔는가를 되돌아 보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다.
각종 공무원 임용시험이나 대입 수능시험에서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밀려났고,
중등교육과정에서도 국사는 별도의 교과목으로 지정돼 있지 않을 정도로
홀대받고 있다. 우리 무대에서조차 국사가 조연(助演)은 커녕 단역(端役)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역사 기술의 요체는 그것이 진정 어떠했는가(Wie es elgentlich gewesen ist)”라고 설파한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의 외침은 한 몽상가의 공론으로 추락한 지 오래이다. 아무리 역사를 공정하고 정확하게 기술하려 해도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중국처럼 다부지게 마음먹고 왜곡을 자행함에 있어서랴.
사태의 진행으로 보아 고구려사 왜곡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분쟁처럼 장구한 세월을
보낼 수도 있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사 왜곡 현안이 우리에게 귀중한 깨달음 몇 가지를 선사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중국의 만행에 분노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먼저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을 우리의 앞마당처럼 만만하게(또는 우습게) 봐 왔던 우리의 불찰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중국은 우리를 자국의 이익 실현을 위한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 또한 깨닫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잠자던 역사 의식을 일깨워준 것이다. 이 점 진심으로 중국에 감사해야 한다.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극에 달하면서 발발했던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이 각각 100주년과 11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한 올해의
한반도 상황은 불행히도 한 세기 전과 너무나 흡사하다.
바꿔 말하면 지금이야말로 올곧은 역사 의식으로의 무장이 더욱 긴요한 상황이다. 그것을 중국이 일깨워주었다.
(국민일보 / 윤재석 편집국 부국장 200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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