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史 방치한 우리부터 반성을"

사재털어 '광개토대왕릉' 전신주 철거한 권혁종씨

“저야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아저씨’였지만 소중한 유적의 훼손을 막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도움을 안주더니….” 지난 2000년 5월 자비를 털어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현 태왕릉 에 박혀 있던 전신주를 철거해 화제가 됐던 권혁종(44)씨. 권씨 는 지난 99년 7월 경북지역 중고생 30명과 함께 고구려 유적 탐사에 나섰다가 믿기 힘든 광경을 보았다. 역사학자들이 광개토대왕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는 태왕릉 위에는 낡은 전신주가 버티고 있었고 장수왕의 묘로 추정되는 장군총은 철제 계단에 눌려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일본, 중국 관광객은 물론 한국인들까지 유적 위에 올라가 담배 꽁초를 비벼 끄는 모습도 보였다. 이후 전신주를 뽑기 위한 권씨의 ‘전쟁’이 시작됐다.

“전신주 하나 뽑는 것인데 뭐 그리 어려울까 싶어 그냥 조상님께 할 도리나 하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지요”. 그러나 권씨 의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여행사를 운영하던 권씨 는 한국으로 돌아와 발이 닳도록 경북 지역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며 고구려 유적을 살리자고 호소했다. 지역신문에 10 회가량 광고까지 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공연한 일을 벌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돈을 뜯어내려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고요”.

예상치 못한 중국 정부의 압력도 이어졌다. 중국에 입국할 때마다 공안들이 따라붙었고 3일간 구금돼 구타를 당한 적도 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역사임을 인정하라”는 참기 힘든 말도 들어야 했다.

결국 철거 비용 2억원를 비롯해 상당한 돈을 지출하고 나서야 전신주를 철거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요청할 경우 중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안들어준다는 것을 깨달았죠”. 권씨 는 중국 지인을 통해 전력회사에 “전신주가 낡아 화재의 위험이 있다”는 민원을 제기, 2000년 5월에야 전신주를 철거할 수 있었다. “자기들 유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방치해두었겠습니까. 그냥 돌무덤 쯤으로 생각하다 이제와서 자국사라고 우기는 것은 말이 안되죠.” 권씨는 한국쪽 대응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씨는 “정치인 몇명이 사과를 요구하고 네티즌이 흥분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중국탓을 하기 앞서 역사를 ‘버려두었던’ 우리부터 반성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는 또 “중국 시찰을 다녀 온 국회의원 중 만리장성은 다 가봤어도 고구려 유적을 보고 온 의원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국민들이 역사 인식 을 새롭게 해야 한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역사가 중국의 소수민족사로 편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화일보 2004-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