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의 역사적 무지를 고발한다"
필자는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시청출입기자를 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서울시청의 무지를 고발하고자 한다.
서울시는 최근 발굴된 고구려 보루(堡壘.둘레 300m 이하의 작은 성으로, 적은 군사로 넓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산의 돌출된 곳 등에
쌓은 고구려의 특징적인 방어 시설)인 서울 아차산 자락 홍련봉 1보루에 대해 ‘별 것 아닌 유적’인 듯이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위 ‘문화
르네상스’를 꿈꾼다는 서울시가 실제는 얼마나 우리 역사와 문화의 진정한 이해에 둔감한가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서울시를 고발하는 필자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고, 왜곡됐을 수도 있다. 누구나 자신만이 옳고,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필자 역시 이 같은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우리 문화유산과 역사를 사랑하는 독자와 서울시민, 전문가들을 상대로 필자가 ‘원고’를 자청하고, 서울시를 ‘피고’로 내세워
시비를 가리고자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이 글을 읽는 시민과 독자, 그리고 전문가 모두 필자의 주장을 면밀히 읽어 주신 뒤 시비를 가려주시기를
바란다. 또한 필자의 글에 대한 반론이나 비판도 언제나 환영한다. 물론 서울시의 반론이라면 더욱 환영한다.
필자는 지난 8월 13일자 조선일보 A 11면에 “서울 광진구 광장동 홍련봉 1보루에서 서기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쌓은 고구려의
장대한 보루의 성벽 일부가 발굴됐으며, 보루 내부에서는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수막새)와 夫(부)자와 父(부)자를 새긴
기와, 치(雉. 방어를 위해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시킨 구조물), 온돌 등이 발굴됐다”는 기사를 썼다.
필자는 기사에서 “남한에서는 첫 출토된 연꽃무늬 기와는 왕궁 등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기와로, 결국 홍련봉 1보루에는
고구려의 최고위 지휘관이 주둔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며 “남한에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유적 발굴이 10여 차례 미만에 불과하며, 고구려 보루
발굴도 이번이 네번째이기 때문에 홍련봉 1보루는 서기 5~6세기 한강을 장악했던 고구려의 실체와 고구려의 군사 편제 등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유적이라고 학계는 평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홍련봉 1보루 발굴을 고려대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뢰했던 서울시측은 본지 기사가 보도된 13일 오후 긴급 기자설명회에서 “홍련봉
1보루는 지금까지 (세 차례) 발굴했던 고구려 보루 유적과 비교할 때 그리 중요한 유물이 나오지도 않았으며, 서기 6세기 전반에는 고구려에서
기와가 일반적으로 사용됐으므로 홍련봉 1보루에 최고위 지휘관이 주둔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면 ‘홍련봉 1보루는 별 것 아닌 유적’이라는 투였다. 이날 기자설명회에서 서울시는 “홍련봉 1보루는 역사적으로 이런 이런
의미가 있는 유적”이라는 설명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기자설명회를 위해 배포한 자료 역시 A4용지 단 한 장짜리에 사업개요, (발굴)
추진 상황, 발굴조사 성과, 향후 추진계획만이 요약돼 있었다.
기가 막혔다. 서기 6세기 고구려에서 기와가 일반적으로 사용됐다는 표현도 그렇고, 홍련봉 1보루를 별 것 아닌 유적으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도 그랬다. 솔직히 필자의 당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자국 역사라고 주장하며 어찌됐든 중국
지안(集安)의 국내성이나 환도성을 보존하려는 중국보다 서울시가 나은 게 뭐가 있는가” 하는 울분마저 치밀었다.
이제 필자는 조목조목 서울시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과연 홍련봉 1 보루가 “별 것 아닌 유적”이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서기 6세기 전반, 고구려에서 기와 사용이 일반화됐다?
서울시는 13일 오후 기자설명회에서 “당시(서기 6세기 전반기)에는 고구려에서 기와 사용이 일반화됐다”며 “따라서 홍련봉 1보루에서 고구려
기와가 나왔다고 이를 고고학적인 위세품(威勢品. prestige goods. 고고학 용어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사용했던 유물 등을 말한다)으로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우선 서울시에 묻는다. 홍련봉 1보루 외에 고구려 기와가 나왔던 고구려 보루성이 어디 있는가? 홍련봉 1보루 발굴 책임자이며, 또한 국내
고구려 고고학의 최고 권위자의 한 사람인 최종택 고려대 교수조차 “아차산성 주변 고구려 보루에서는 고구려 기와가 출토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기와가 서울시의 표현대로 서기 6세기에는 일반적인 가옥에 사용됐을 정도로 일반화됐다면 아차산 주변의 고구려 보루에서도 기와가
나왔어야 옳다.
이 장면에서 국내 최고의 기와전문가로 꼽히는 김성구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의 말을 들어보자.
“기와는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권위의 상징으로, 고려 이후는 부의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기와집이 부의 상징이었다는 점입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며 불렀던 새마을운동노래
기억나지요? 그것은 20세기까지도 기와를 사용하지 못한 초가집이 많았다는 사실을 웅변합니다.
하지만 기와가 부의 상징이었다는 주장은 고려시대 이후에나 적용가능한 표현입니다.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기와는 단순한 부의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위의 상징이라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신라나 백제는 6세기 전반에만 해도 기와 사용이 궁궐이나 왕실 관련 사찰 정도에
국한됐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신라나 백제에 비해 선진국이었던 고구려가 이 시기(서기 6세기 전반) 기와 사용이 백제나 신라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주요 관청이나 평양지역의 상층 귀족까지만 사용이 가능했을 겁니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도 “서기 6세기에 멸망한 가야에서는 기와가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서기 6세기 전반, 고구려의 기와 사용이 ‘일반적’이라는 것은 결국 신라나 백제에 비해 고구려에서 기와 사용이 잦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기와 사용의 보편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시의 표현처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건물에도 기와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서울
아차산 주변 고구려 보루에서 기와가 발굴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 숨어 있다. 그것은 홍련봉 1보루에서 고구려 연꽃무늬 수막새(처마 끝에 놓는 장식 기와)가 남한에서는
최초로 발굴됐다는 점이다.
◆“연꽃무늬 수막새 발굴 소식에 악 소리가 났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홍련봉 1보루에서 남한 최초로 연꽃무늬 고구려 수막새가 발굴됐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성구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의 경우, 그 소식을 듣고 “악 소리가 났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도대체 연꽃무늬 수막새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호들갑’일까?
앞서도 설명했듯 수막새는 처마 끝에 놓는 장식 기와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붕을 덮는 기와가 아니다. 일반 기와보다 기술적 완성도도 높을
뿐더러, 장식성도 훨씬 강하다. 그만큼 격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막새기와는 삼국시대 유적에서는 잘 발굴되지 않는다.
일례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서기 475년 참수하고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당시 백제의 왕성(王城)이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한동안 주둔했다. 백제의 왕성에 주둔했으니, 당연히 고구려군의 격도 높을 터. 하지만 이곳에서조차 고구려 수막새는 발굴된 바가 없다.
한데, 아차산의 한 봉우리에 있는 전체 길이 130m 정도의 조그마한 보루에서 고구려 연꽃무늬 수막새가 딱 한 점 발굴된 것이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시 김성구 부장의 말을 들어보자.
“장식성이 강한 수막새는 일반 기와와는 격이 또 다른 것입니다. 대단한 위세품(威勢品)이어서, 서기 6세기에는 국가가 사용을 규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라가 계급에 따라 어떤 색깔과 어떤 재질의 옷을 입을 수 있고, 집 규모는 어느 정도까지 지을 수 있는지 등을 규정했다고
삼국사기에 적힌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홍련봉 1보루에서 남한 지역 발굴 사상 처음으로 고구려 수막새가 나왔다는 사실은 결국 홍련봉 1보루에는
계급이 무척 높은 고구려의 지휘관이 주둔했으며, 따라서 홍련봉 1보루가 아차산 주변 고구려 보루의 중심기지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백제와 최전선을 형성했던 아차산 고구려 보루에서 수막새를 한가롭게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아마 평양에서 한, 두 점 홍련봉
1보루의 군사 지휘자에게 보냈을 것이며, 때문에 수막새는 처마가 아니라 기와 건물의 가장 높은 부분을 상징적으로 장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했다.
그의 추론은 현재로서는 신빙성이 무척 높아 보인다. 홍련봉 1보루에서는 기와조각이 수백점 나오고 있지만, 수막새는 단 한 점만이 발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수막새를 모든 처마 끝에 장식했다면, 수막새가 단 한 점만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군사기지에 당시로서는
그토록 귀한 기와를, 그것도 수막새를 사용했을까? 예나 오늘이나 군대는 실용성이 최우선이다. 군복이나 무기가 실용적이어야지, 장식적이라고 좋은
것은 아니다. 군사용 건축물 역시 마찬가지다. 적군을 방어하고 정찰하기도 바쁜 판에 기와 건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도 “왜 군사용 건물에 당시로서는 귀하디 귀한 기와를, 그것도 수막새마저 사용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추론을 하나 해 보자. 서기 6세기 전반. 고구려와 백제는 한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다. 백제의 막사는 고작 풀로 이은
초가이다. 하지만 강 건너 아차산에 자리잡은 고구려 보루에는 백제에서는 수도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기와가 가옥에 얹혀 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궁궐이나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든 수막새가 장식돼 있다.
그 때 국경의 백제군들이 느낀 초라함은 어떠했을까? 홍련봉 1보루의 수막새 장식 건물은 결국 고구려의 국가적 권위를 나타내며, 고작
초가지붕을 막사로 썼을 국경의 백제군을 심리적으로 압도하는 효과도 노렸는지 모른다. 수막새 한 점에만도 이처럼 깊은 역사적 의미가 숨어 있는
셈이다.
◆가치 없는, ‘별 것 아닌’ 유적은 없다
홍련봉 1보루에서 출토된 수막새나 기와를 통해 홍련봉 1보루가 서울시의 주장처럼 결코 “별 것 아닌 유적”이 아님을 이미 살폈다. 기와는
결코 서기 6세기 전반, 고구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 기와는 그렇다치더라도, 연꽃무늬 수막새는 위세품
중의 위세품이다.
기와만으로 홍련봉 1보루의 지휘관을 ‘고위’라고 단정짓지 못할지라도, 수막새를 통해서는 그 같은 주장을 충분히 펼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홍련봉 1보루의 지휘관이 고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군색하고, 반론의 가능성도 더 많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홍련봉 1보루에서 수막새나 일반 기와가 나왔다고 홍련봉 1보루 유적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 기와에서만이겠는가?
화장실 고고학(toilet archaeology)이라는 용어가 있다. 고대의 화장실 분석을 통해 당대인들이 어떤 기생충에 감염됐고, 영양
상태나 질병 상태는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고고학 연구 방법론이다. 쓰레기고고학(garbage archaeology)도 있다. 폐기돼 퇴적된
쓰레기를 통해 당대인들이 어떤 물건을 주로 사용했는지 등 생활상을 살피는 고고학 방법론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쓰레기터인 조개무지 발굴도 일종의
쓰레기 고고학이다.
고고학의 최종 목표가 과거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라면, 발굴된 유구(遺溝·건축물 등의 남은 흔적)나 유물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때문에 홍련봉 1보루에서 중요한 것은 기와나 수막새, 혹은 발굴된 성벽의 장대함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루 그
어딘가에는 화장실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6세기 전반기 고구려 병사들의 건강 상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우리의 실력이나 발굴
여건이 그에 못 미쳐 찾지 못할 뿐이다.
때문에 유적이나 유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항상 경건해야만 한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는 아무리 똑똑해도 유물을
덜렁거리며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유물을 손대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역사 앞에서 우리는 모두 초라한 인간이라는 뜻이었을 게다.
하지만 역사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역사는 끝내 침묵하는 법이다. 하물며 드러난 가치조차 “의미가 없고, 하잘 것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혹은 기관)에게랴!
◆발굴 의뢰 뒤 서울시가 보인 관심은?
글을 맺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지난 13일 본지 보도 직후 서울시가 보인 일련의 태도들이다.
본지 보도를 접한 직후 각 언론에서는 발굴 결과에 대해 당연히 다투어 물었다. 하지만 13일 오전 서울시의 답변은 “발굴단으로부터 보고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였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서울시가 홍련봉 1보루 발굴만 처리하는 부처는 아니므로.
한데 정작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이날 오후 1시 30분 열렸던 기자설명회에서였다. 서울시 관계자는 발굴 조사 성과로 유적 내부에서
온돌터와 건물터, 저수시설이 확인됐으며, 고구려계 기와편 다수와 夫(부)자가 새겨진 토기 등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회견장에서 어느 기자가 물었다.
“수막새는 발굴 안됐나요?”
조사 성과에 수막새는 전혀 언급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시 관계자의 답변은 이랬다.
“아! 그것은 나중에 서울시로 보고가 됐습니다. 우리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온 나라가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로 시끌벅적한 이 때, 서울시는 서울 한복판에서 귀중한 고구려 유적이 발굴 중인에도 그저 발굴단의
보고에만 의존해 발굴 성과를 파악하는 책상머리 행정(arm-chair administration)만 하고 있나 보다,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오는 23일 열리는 발굴지도위원회에서도 서울시는 홍련봉 1보루가 ‘별 것 아닌 유적’이며, 발굴지도위원들의 물음에도 발굴단으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한 사항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이야기할지 궁금할 뿐이다.
(조선일보 / 신형준 사회부기자 2004-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