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소아적 아집 버려야

고구려 역사를 중국이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겠다고 한다. 21세기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이런 충격적 작태가 어떻게 이웃 국가간에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힘이 없으면 어떤 외세로부터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는 냉혹한 국제 역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주변 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는 역사였다. 왜 그토록 우리 민족은 주변 민족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왔는가. 땅,사람 수가 적어서인가. 외세가 호전적이었기 때문인가. 다소의 이유는 되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자폐적 협소한 시야로 민족의 저력을 키우지 못한 우리 민족 내부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 되겠다는 상황주도적 세계관을 키우지 못했다. 외래 사상에 매몰·집착하여 다른 생각을 가져본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겼다. 이 아집들의 군상이 내편, 네편으로 분열하여 집안싸움에만 골몰하다가 나라를 지리멸렬, 쇠약하게 만들었던 것 아닌가. 만약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율곡의 10만 양병론이나 효종의 북벌론과 같은 정신을 그들의 기풍으로 삼았을진대 일본에게 국권을 잃었던 경술년의 저 처참한 민족 최악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 이 자폐·소아적 아집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상호 보완적으로 상생할 동반자로서보다 퇴출이나 굴복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편가르기가 성행하고 있다. 내 편의 이야기는 항상 옳고, 다른 편의 이야기는 무조건 틀린 것으로 선을 그어버리고 있다. 대화가 아닌 안티(반대)의 대상으로 상대한다. 자신들만의 생각이 옳다는 자기 확신에 차 있다.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도 합리화된다. 타협과 절충이 없다. 상대방의 패배나 양보가 최후의 목표이다.

특정 신념을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은 위험하다. 억울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인류의 비극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이들은 소신을 굽힐 줄 모르는 신념의 사람들로 생각하기 쉽지만, 스스로 친 사유의 덫에 갇힌 사람들에 불과하다. 사상과 신념은 우리의 생각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사람의 생각에는 얼마든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식능력에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 국가, 사회 전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외세가 떠난 지 반세기, 여러 굴곡이 있었지만 우리는 기적적 경제 개발을 이루었고, 사회 전면에 민주화를 진행시켰다. 오늘의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반개혁, 민주·반민주, 항일·친일, 친미·반미, 친북·반북, 통일·반통일, 진보·수구, 친정부·반정부 언론 등 편 가르기로 사회전체가 내분에 휘말리는 것은 결코 좌시할 일이 아니다. 예컨대, 과거 친일행적을 밝히는 것은 진실 규명차원에서 좋은 일이지만, 만일 이것이 국민들 사이에 하나의 벽을 치는 것이라고 느낄 만큼의 정치수단으로 나간다면, 역설적이게도 이 정도만큼이나마 축적된 국민적 역량과 통합을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그런 것은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처사라고 보기 어렵다. 오늘의 이 나라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이름 몇 자 오른 사람들만의 나라가 아니다. 기록과 이름 없이 항일하다 죽은 사람,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 강대국의 힘으로 얻어진 해방 공간에서조차 서로 의기투합하지 못하고 소위 항일 독립 세력들의 자기만 옳다는 아집으로 벌어진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동족상잔에서 쓰러진 수많은 사람, 불과 지난 40년 동안 서양에서 200년 걸렸던 산업화를 묵묵히 일궈낸 생산 현장의 역군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이고 그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여야 한다. 과거 한때의 잣대로 오늘을 재단하는 것은 이래서 위험하다. 항일 독립운동, 민주화, 경제성장 등 그 어느 상징적 가치도 결코 어느 특정 정파나 집단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이 땅에 삶을 가진 국민 모두의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정치지도자들의 책무이다.

대화, 타협, 절충을 모르고 극한적 방법을 마다하지 않는 아집들의 군상이 어떤 정체를 가진 집단인지 국민은 똑바로 보아야 한다. 자유는 현명한 국민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좋은 점은 이견과 차이를 절충하고 통합하여 대내외적으로 보다 강한 공동체를 열어가는 데에 있다. 현명한 국민은 아집에 빠진 집단들이 득세하여 나라를 자폐에 빠지게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외세의 도전 앞에서 내분으로 주저앉았던 과거의 전철을 또다시 되풀이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곽병선 / 경인교대 초빙교수>

(국민일보 2004-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