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周恩來와의 부끄러운 재회

기자가 공산혁명 이후 오랫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재회’한 게 대학 졸업 후 처음이니까 대략 20년 만이다. 지주 출신의 공산혁명가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중국인 중의 한 명인 그는 중용(中庸)의 정치인, 지혜의 외교가였다.

생전에 저우 전 총리에게 한 서방 기자가 물었다. “중국에도 창 녀가 있습니까”.…“있습니다. 대만에”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 는 점을 한마디로 압축한 재치. 저우는 파리에서 유학한뒤 사회주의혁명에 뛰어들었고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대장정을 이끌었으며, 항일 국공합작운동을 주도했다. 공산혁명 후 1949년 총리로 발탁돼 신중국의 뼈대를 세웠고, ‘문화대혁명’의 광란을 수습했다. 미·중 핑퐁외교를 이뤄냈고, 월남전을 종식시킨 파리회담을 성립시켰다. 그는 제갈공명에 비견되지만 결과로 보면 공명 보다 더 성공적인 2인자였다.

저우는 확실히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욕과 사회과학적 지식에 목말라 했던 기자의 학창시절,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몇권의 책 속에 등장하면서 설렘으로 다가왔던 당대의 거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와의 해후는, 감격이라기보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왜냐고? 그는 한국인보다도 한국역사를 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저우가 “고구려의 역사뿐 아니라 발해의 역사까지 조선(한국)의 역사 였으며, 중국의 동북지역이 조선민족의 터전이었다”고 발언한 게 지난 1963년이란다. 설훈 전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저우 전 총리는 그해 6월 28일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마치 지금의 고구려사 왜곡사태를 예견이라도 하듯 자신의 사관을 세밀하게 밝혔다.

중국 동북부지역에 남아있는 조선인 삶의 자취에 대한 문헌적 이해와 해석으로 시작한 그의 탁견은 중국 사가들의 봉건·대국주의적 태도와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 진·한·수·당·원·명· 청으로 이어지는 중국 왕조의 조선 땅 침략 등에 대한 고해성사 로 이어졌다. 그가 조선과학원 대표단에게 설파한 조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번에 공개된 것만 원고지 50장이 넘는 분량이다.

그는 “역사의 진실성은 반드시 회복돼야 하며 역사를 왜곡해서도 안된다”면서 조·중 관계의 모든 불평등한 것이 ‘역사학자 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라고 고백했다.

그후 40년, 저우 전 총리의 걱정은 현실이 돼 돌아왔다.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한·중 수교의 정신인 ‘샹치엔칸’(向前看:‘앞 을 바라보는’의 뜻)의 관계에서 이미 일탈했다. “앞을 보자” 던 중국은 지금 “과거를 삼키자”고 덤비고 있다. 하지만 중국 만을 탓할 것도 없다. 중국이 ‘역사 동벌(東伐)’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준비했나. 과연 우리에게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과 안시성싸움 등 몇몇 조각난 기억의 편린 이외에 고구려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가. 우리는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해 왔는가.

…만일 이런 것들에 대한 답변이 궁색 옹졸하다면, 또 그 이유가 우리 역사에 대한 집단적 소홀과 무관심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우리 스스로가 고구려를 버려온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저우와의 20년만의 만남이 반가움이 아닌 부끄러움인 이유다.

저우는 조선과학원 대표단과의 면담을 마치며 이렇게 당부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 연구하면서 우리(중국)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시기의 관건은 연구하는데 있습니다. 배워서 통하지 않으면 손해입니다 …” 저우는 궁극적으로는 앎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할 경우 자기 역사를 지킬 수 없다는 경고를 남기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일보 2004-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