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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공동체는 없다
'빛을 숨기고 실력을 쌓는다'(韜光襄晦)는 중국의 21세기 전략도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다. 빛을
숨긴다는 말은 칼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과 같은 말일텐데 칼을 빼드는 상대가 있고, 여전히 칼을 숨기는 상대가 있다.
미국에는 칼을 숨기고 우리에게는 칼을 빼들고 있는 형국이다. 말하자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것을 '도광양회'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제국주의 때문에 고통을 받은 우리가 제국주의로 나갈 턱이 있겠느냐'던 중공당의 지난날 말들은 다 어디로 갔나?
우리가 강자들 말에 놀아난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하기야 어리석은 자를 갖고 노는 것이 말의 힘이기도 하다. 고구려사를 하이제킹하고 있는
중국의 칼끝이 앞으로 어디로까지 뻗힐지 알 수가 없다.
고구려가 그들의 땅이라면 고주몽의 아들들이 세운 백제도 그들의 땅이라고 할 것이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줄에 꿰어져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과거를 하이제킹한다는 것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까지 하이제킹할 작정을 세워두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이것이 제국주의이지 다른 무엇이
제국주의인가? 그런데 우리는 제국주의 세력과 동북아 공동체를 한다고 '동북아 중심' 운운하면서 그동안 그렇게 부산을 떨었나?
지금 세계에는 세종류의 국가가 있다. 국민들이 편가르기를 거듭하며 내전을 벌이는 전근대국가가 있고, 국민도 하나고 국가도 하나인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가 있으며,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민국가(supranation―state)가 있다. 초국민국가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국가라고 하지만 표현을 어떻게 하든 하나의 제국(empire)이다.
이 세 국가군 중 중국은 어디에 속하나? 서로 다른 말과 인종, 문화전통을 하나의 국가 주권 아래에 통합하고 있는 것을 초국민국가라고
한다면 중국도 바로 그런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일본은 어떻게 되나? 애시당초 중국이 제국이라면 애시당초 일본은 동북아 국가가 아니다.
일본이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들어간지 이미 100년이 넘는다.
탈아입구(脫亞入毆)한 일본이 탈구입아(脫毆入亞)로 돌아서지 않고 있을 뿐더러 대중화 공영권 또는 차이나 엠파이어의 등장과 함께 미.일
동맹을 한층더 강화하고 있다. 동북아 국가가 아니라는 국가를 두고 과거사 청산은 국내용이라고까지 해가면서 동북아 공동체 건설에 함께 나서자고
매달리는 꼴이 연출되고 있다.
햇볕정책에는 서독의 동방정책, 동북아 공동체에는 유럽 공동체의 이야기를 들이댄다. 남들이 한 일을 우리라고 왜 못하겠느냐는 식이다. 실제로
이 둘 사이에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비슷한 점이 있다기보다 어떤 의미에서 햇볕정책은 동방정책, 동북아 공동체는 유럽 공동체의
복사품이다.
서독과 프랑스가 유럽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편찬했다고 하니까 한-중-일 3국도 공동의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자고 한다. 또 서독은 과거 반성을
했는데 일본은 왜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공동의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든 역사 희생자들의 위령탑 아래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든 이 모든 것들은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이다. 서독이 그렇게 한 것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더불어 힘을 합쳐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현재와 미래의
요구가 같아야 과거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다. 일본은 10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동북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생각이 없고, 중국 또한 동북아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완결의 제국의 새 아침을 열고 있다. 동북아 공동체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국민국가 완성이 먼저일텐데 밖으로는 허상을 좇고 안으로는 국민분열을 거듭할 경우 역사는 반드시 보복을 한다. 국민국가가 분열할 때는 그냥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유혈의 파열음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렵고 긴장된 순간에 서 있다.
'도광양회'는 중국인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중국의 고구려사 하이제킹을 보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동남아 상륙을 앞두고 백인종의 제국주의이든 황인종의 제국주의이든 제국주의는 다 같은 제국주의라고 한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의 말이
떠오른다.
(머니투데이 / 최병권논설위원 200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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