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빈곤 드러낸 중국 '동북공정'

우리 민족사 정통성의 핵심 중 하나인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정권'이라고 규정하는 데 대해 국민은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소위 '동북공정'에는 '과거의 정치화'라는 '역사관의 빈곤'이 깔려 있어 우리의 중국관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과 함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한 목소리로 규탄해 왔다. 이제 중국은 고구려사 왜곡으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다. 한.중 양국 간의 선린관계에도 금이 가게 됐다. 일본은 경제면에서는 경제대국이 됐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사상적 리더가 되기엔 몸집은 커졌으나 마음이 왜소해 섬나라라고 비난받아 왔다. 이제 신중국도 경제 개발엔 성공했으나 문명적 가치관이 성숙지 못한 '동아시아 역사관의 빈곤'으로 정신적 미숙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역사 개념이나 역사관이 저개발의 후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중국'과 그 '변방정권' 따위의 낡은 복고적 사관에 놀랄 수밖에 없다. '변방정권'으로 고구려를 규정한다면 이 '공정'은 그 '중심정권'이 어느 것인지 감히 밝힐 수 있을까. 전통 세계에서 중국 대륙 그 어디에도 근대 통일국가 모델의 '중심정권'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공정'은 '왕조'와 '정권'의 개념적 차이에도 둔감한 학술 수준을 드러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청나라는 패배한 사실에 대한 인식능력이 없었다. 오랫동안 중화주의 '천하'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청나라 지식인들은 새로 형성된 국제질서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지 못했다. 청말 변법자강파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그때까지 중국 대륙권에는 "조정도 있고 천하도 있으나 국가가 없고 따라서 국사 사상이 없다"고 개탄했다. 20세기 초까지 과거의 중국에는 수많은 왕조가 있었고, 심지어 원(元)나라는 몽고 왕조였고 청나라는 만주족의 왕조였다. 그런 시기엔 외세의 식민지 상태가 아닌가.

더욱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열국경쟁'하던 1000여년 전에 그 어디에 오늘의 '국가'와 같은 '중앙정권'이 있었겠는가. 신해혁명 뒤 처음으로 쑨원은 '멸청흥한(滅淸興漢)'의 기치를 내걸고 1912년 1월 '중화민국'을 선포했다.

오늘의 '동북공정'은 중원을 지배해온 청나라에 대한 역사 재해석을 거쳐 고구려사 왜곡에까지 이르고 있다. 신중국은 과거 일본이 만든 '만세일계(萬世一系)'의 단선적.일원적 허구의 역사관을 그대로 모방해 '과거에 대한 정치화'를 행정력을 동원, 역사적 사실 무시의 엄청난 역사관념론을 '창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을 닮아가고 있는가. 이런 단선적 사관은 근대민족주의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오늘의 '중국'을 과거에 투영, 역사를 '과거의 정치 도구화'로 삼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건국 초기에는 계급주의 사관으로 지난날의 수많은 왕조와 진시황 등 역사적 인물을 모두 반인민적 압제자로 낙인 찍어 부정했다. 이런 극좌적 사관에 기울어 '과거 허무주의'의 오류에 빠졌다가 그것에서 벗어나 최근엔 극우적인 중화주의의 시대 착오적인 역사관으로 다시 빗나가 좌충우돌하고 있다.

지난날 중화주의에서는 '네 오랑캐(四夷)'라 하여 주변 나라들을 깎아내리고 서양을 '남쪽 오랑캐'란 뜻의 '남만(南蠻)'으로 불렀다. 그런데 오늘의 중국은 어느덧 자신이 '남만'화하고 있는 격이다. 중국은 오늘날에도 서양제국을 '변방정권'이라 할 것인가.

A J 토인비는 세계 사관을 새로 구성하는 발상 전환을 감행했다. 토인비는 과거 유럽 역사에 대해 '종족'이나 '민족''국가'를 단위로 해서는 역사적 설명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역사는 '문화' 또는 '문명'을 단위로 해야 한다는 새로운 발견을 한 것이다. 그 후 유럽에서는 프랑스.독일 등 각국이 근대 이전에 대한 단선적인 민족주의 사관의 허구를 청산하고 전통시대에 대해서는 유럽 공통의 '유럽문명사'로 대치했다. 르네상스 때까지도 프랑스.독일 등의 국왕이 로마교황청의 뒷문에 와서 맨땅에 꿇어앉아 용서를 빌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종교적 '권위'로 보편적 명분이 지배했던 중세시대의 낡은 구조를 근대민족국가 시대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바티칸이 있던 이탈리아가 '중앙정권'이 되고 그 밖의 모든 유럽 나라는 '연방정권'이었다고 할 것인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고구려사를 왜곡하면 중국사 전체를 이에 맞춰 더 많은 왜곡을 하게 된다. "거짓말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기억력의 천재가 되어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이 '공정'은 동아시아 사관의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이 이웃나라의 역사전통에 대한 침탈을 서슴지 않는 패권주의의 험상궂은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우리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고구려는 후3국 시대에 다시 통일돼 왕건의 고려에 계승되고 고구려의 후계왕조인 발해의 왕족과 유민도 고려에 흡수됐다. 중국 대륙의 어느 왕조가 고구려의 계승자인가. 고구려와 고려의 국호는 온 세계에 '코레(Coree)' 또는 '코리아(Korea)'로 알려졌다.

한국은 고구려의 구강(舊彊)인 중국 동북지방을 지금은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북공정'이 오늘의 영토문제와 과거의 역사문제를 구분하는 세련된 역사인식이 없는 데서 생긴 중화 '패권주의'의 복고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중국 동북지역의 고구려 문화유적과 그 당시의 고구려는 명백히 우리 민족의 역사에 속한다. 21세기 문명시대에 중국의 '동북공정'은 오늘의 '중국'이 1000여년 전에 고구려라는 변방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역사왜곡의 정치공작에 동원되는 학자들이 느낄 학문적 양심의 아픔도 헤아려 봐야 할 것이다.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철학>

(중앙일보2004-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