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식충돌

고구려를 중국사에 완전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이 촉발한 한·중간의 역사 분쟁의 밑바닥에는 고대 동아시아사에 대한 두 나라의 ‘일국주의적 관점’의 충돌이 있다. 이는 근대적 개념인 ‘민족’을 토대로 한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발해 역사를 바라보는 한국과 중국의 관점이 그동안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의 시각차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선결요건이며, 장차 한·중 공동역사인식의 틀을 만드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13일 오전 10시 한국언론재단회관에서 ‘한국근대사와 고구려·발해인식’을 주제로 학술모임을 연다. 근대 이후 두 나라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좋은 기회다.

중국 소수민족 집나갈라
영토족보 최근 정비

동북공정은 현대 중국의 민족관·영토관·국가관이 응축된 역사인식의 산물이다.

윤휘탁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은 이번 학술대회 발제문을 통해 ‘현실의 중국’이 고구려사 왜곡에 어떻게 투영됐는지를 살폈다. 윤 연구위원이 보기에 중국 역사인식의 큰 줄기는 ‘애국주의’와 ‘집체(集體)주의’다. 근대 이래 일본과 서구세력의 침략을 받은 역사적 경험 때문에 “외국의 침략행위·패권주의적 행태·우경화에 대해 적개심마저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우리의 근대 이후 역사인식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런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주변 민족’에 대한 또다른 패권주의적 접근으로 번진다. “소수민족의 자치권이나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국가적 분열’이나 ‘집체에 대한 불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중화 다원일체론 바탕
발해·고구려 소유 주장

그 결과 굳어진 중국의 민족관·역사관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또는 ‘중화민족다원일체론’이다. 중국 민족은 별개의 다수 민족의 총합이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한족과 이민족이 서로 융합된 ‘복합민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 중국 영토 내에서 활동했던 모든 민족은 중국민족(중화민족)이고 그들의 역사적인 활동은 모두 중국사의 범주에 속한다. 고구려와 발해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윤 연구위원은 특히 90년대 이후 중국의 변화를 주목한다. “개혁·개방 정책 실시 이후, 한족이 주로 거주하는 동남 지역과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내륙 지역 사이의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자본주의 산물로 금기시됐던 민족문제가 다시 거론되면서, 티벳과 신강·위그르 지역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어나는”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재외동포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한국내 중국동포들이 국적회복운동을 벌이고, 수많은 탈북자들이 조선족 사회에 편입하는 등 조선족의 ‘중국 국민 정체성’이 남·북한 모두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은 동북 3성 지역의 과거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결국 고구려사 왜곡으로 알려진 중국의 동북공정은 “국민통합과 영토통합을 굳건히 하려는 중국 정부의 고육지책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게 윤 연구위원의 지적이다.

이런 정황은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의 변천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은 1877년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의 발견을 계기로 고구려사와 ‘조우’했지만 이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는 소수 민족에 관해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시됐다는 것이다. 고구려사 편입의 ‘전초전’이었던 발해에 대한 연구도 문화대혁명 이후인 70-80년대에 들어 이뤄졌다..

윤 연구위원은 결국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가 “학문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중국 공산당의 오랜 전통이 작동”한 결과이며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를 재단하는 통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고구려·발해 인식이 전적으로 당시의 역사 사실에 부합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우리 역시 ‘단일민족사관’ 등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역사인식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근대의 산물인 민족개념을 고대사에 무작정 적용시키는 역사접근방식에 대해 많은 고뇌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 “발해·고구려는 우리것”
고려때부터 지속 관심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래, 고구려는 우리 역사의 일부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대 이후 갑작스레 고구려에 눈을 돌린 중국과 그 ‘민족사적 정통성’을 다툴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인식에 ‘시대별 편차’가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연구자들은 10세기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각 시기별 고구려·발해사 인식의 실체를 살폈다.

고려-조선 시대의 역사인식을 연구한 박인호 금오공대 교수(인문사회과학부)는 발제문에서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시대별 인식에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고려는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함께 삼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지만, “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고구려를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으로 한정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는 조선 전기로 이어져 우리 상고 역사를 한반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흐름을 낳았고, 발해의 경우엔 말갈족의 역사로 간주해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일제때 역사왜곡 맞서
만주지역 연구 증폭

반면, 조선 전기에도 개인이 펴낸 ‘사찬사서’에는 압록강 지역과 요동 일대까지 상고사의 영역을 넓혀 규정하고 있어 ‘주류 역사관’과 차별을 보였으며, 특히 조선 중·후기에 등장한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지역까지 상고사를 확대해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박 교수는 “사회개혁이념을 바탕으로 등장한 실학자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체득한 부국강병 의식을 과거 역사에 투영하려는 시도였다”고 짚었다. 이는 구체적으로 단군 조선 이후의 옛 영토인 만주 일대에 대한 관심이자, 고구려와 발해 등 북방지역을 장악했던 국가에 대한 관심이었다.

구한말에 이르러 이런 역사인식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최혜주 숙명여대 연구교수는 당시 대표적 언론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를 주목했다. 장지연·박은식·신채호 등은 두 신문의 역사관련 기사를 통해 만주와 중국 일대를 지배한 고구려·발해를 ‘재발견’했다.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계승의식이 등장하고, 동명왕·광개토왕·을지문덕·강감찬 등이 부각된 것도 이때다. 최 교수는 “이런 역사관은 만주를 우리 민족 형성의 구성요소 안에 포함시켜 국권회복운동기지로 설정한 것과 관련돼 있다”고 지적했다.

일제 강점기는 이런 역사인식이 절정을 이룬 때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은 물론 요와 금까지 포함하는 만주지역 14개 왕조를 모두 ‘배달족’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박걸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 우리 민족이 중국 동북지방을 중시한 이유로 두가지를 들었다. “일제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의 정통으로 복원하고자 한 학술적 이유와, 이 지역으로 이주·망명한 우리 민족의 실질적 생활과 독립운동이란 현실적 측면”이 그것이다.

반면 당시 일본은 고구려사를 축소·왜곡하거나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키면서 이 지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시켰다. 박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중국 동북지방은 고구려·발해사에 대한 극명한 역사 해석의 차이 및 상반된 역사인식이 작용·반작용을 일으킨 곳이었고, 이런 인식주체간 (역사)인식론의 충돌은 최근 한·중간의 문제로 재현됐다”고 분석했다.

(한겨레신문 / 안수찬 기자 2004-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