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초대석> 역사학자 이형구 선문대 교수

"고구려사 왜곡 대응으로 개인감정이 국가감정화" "작금의 방식은 한중관계 도움 안돼"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이 고구려사를 중국 사에 편입하려는 역사왜곡 음모라는 비판이 비등하고 있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하는 학계 일부와 시민단체, '민족자존'을 앞세우는 정치권, 이런 움직임들과 궤를 같이하는 언론매체는 연일 '고구려 사수'의 기치를 휘날리며 중국을 성토하고 있다.

여기에다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던 정부도, 자발적이든 여론에 떼밀렸든, 중국에 대한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대응방침을 표명하고 나섰다.

이 복잡한 '고구려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선문대 대학원장 이형구(李亨求. 60) 교수는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작금의 사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특히 많은 역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1977년 국립대만대 고고인류학과 석사를 거쳐 1987년 같은 대학에서 '발해 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81년 귀국 이후 한국정신문화연 구원 교수를 역임하고 96년부터는 선문대에 재직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업적을 개괄할 때 그에게서 딱히 이것을 전공이라고 집어내 말하기가 어렵다. 석.박사 논문의 주제가 모두 발해만의 고대문명에 관한 것이라 이를 특출나게 거론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학문이 다루는 시공간은 매우 넓다.

"내 연구가 훌륭하다는 자찬은 않겠습니다만, 광개토왕비 전문연구서로는 1986 년에 나온 제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동화출판사)가 지금까지 유일하다는 사실 이 우리 학계의 고구려 연구에 대한 깊이를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그가 일반에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7년 이후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해 백제 왕성임이 거의 굳어져가고 있으며, 아울러 그 보존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민원이 야기된 서울 풍납토성이 계기가 됐다.

일찌감치 풍납토성을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으로 지목했던 그는 이곳 보존운동을 주창해오다, 이곳 주민들에 의해 '화형식'까지 당하는 봉변을 겪었다.

그의 또다른 관심사는 강화. 이곳 고인돌 조사는 거의 전적으로 그의 손을 거쳤으며, 요즘은 강화 일대 고려 왕궁 및 조선시대 성곽 유적 보존운동을 하고 있다. 발해만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사 전체가 그의 전공인 셈이다.

"역사는 좁은 시야에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제가 풍납토성이 왕성임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도 발해만 문명 전반에 대한 연구조사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누차 강조하는 '발해만 연안 문명'이란 무엇일까?

"그에 대해서는 최근에 낸 제 책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04. 김영사)에서 충분히 다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가 말하고자 한 바는 우리 문화의 시원은 발해만 연안이라는 것이며, 신석기-청동기시대에 시작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중국에서 이 발해만 문화 조차 (황하 유역 중심의) 중원문화의 영향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발해만 유역에는 중원문화와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커다란 문명이 있었습니다. 이 문명에서 고조선이 나왔고, 부여와 고구려가 탄생했으며, 그것이 종국적으로 한반도 문명의 저류가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동북공정과 연계해 한국역사학계를 비판했다.

"이렇게 중요한 발해만 문명은 제쳐두고, 한국문화 시원을 시베리아에서 찾았습 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에서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식민지시대에 일본 학자들이 주장한 것을 답습한 전형적인 식민사학의 유산입니다. 그저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근 발간한 도록을 사서 봤더니 여기서도 첫 머리에 한국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에서 왔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은 신석기시대 문명의 개시가 발해만 유역이 시베리아보다 1천년 정도나 빠르다는 사실에서 쉽게 증명됩니다. 그런데도 국가박물관까지 나서 우리 민족문화를 시베리아에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시베리아 기원설이 득세하는 바람에 발해만 문명을 저버리는 결과가 빚어졌으며, 그것이 결국 작금의 동북공정을 불러온 한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 했다.

"동북공정이요? 그건 시베리아만 쳐다본 우리 학계가 자초한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학자 중 과연 몇 명이나 발해만을 주목했나요? 그러기는커녕 발해만을 한국사에서 떼어내버리고 저 멀리 바이칼 호수로만 달려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중국측 움직임을 비판했다.

"중국은 지금의 자국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봐서 중국 혹은 중원은 그 개념과 지역이 같지는 않습니다만, 1946 년 이후에 확정된 지금의 영토 개념을 억지로 고대에 투영한 결과가 바로 고구려나 고조선, 발해 등이 자국사라는 강변입니다. 설혹 그들의 주장처럼 고구려, 발해사 등이 '한국사'가 아니라 해도, 그렇다고 중국사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중국측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식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찬성하지 않는다.

"정도가 지나칩니다. 한-중 모두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 지를 모르겠습니다. 영토 50배, 인구 20배 인 중국과 덮어놓고 한 판 붙어보자는 심산인가요?. 공존의 방안을 찾아야지요"

이 교수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분석도 내놓았다.

"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분출되고 있는 '고구려 현상'이 우리 국민의 일반감정과는 꽤나 괴리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 상당수는 고구려가 어떻게 되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시끄러운 듯 느껴지는가?

그것은 이번 사태를 통해 자기들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일부의 의도가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들은 고구려 역사나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에는 신경쓰지 않고 일반여론에 호소하는 방식, 예컨대 시위와 같은 방식을 조장함으로써 자기들의 공명심을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치권과 언론계 등이 동조하거나, 오히려 앞장서 그런 움직임을 부채질하고 있으며,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뭔가 특단의 조처를 취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고구려사 사태를 '개인감정'이 '국가감정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하면 됐습니다. 냉철해져야 할 때입니다. 뒤로 한 발 물러나 침잠해서 학계의 역량을 조용히 키울 때입니다"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오도되는 측면이 많은 것같다고 덧붙였다.

"동북공정은 기본적으로는 동북지역에 대한 중국의 경제개발계획입니다. 중국은 왜 이를 추진하게 됐는가? 동북지역은 베이징(北京)이나 상하이(上海), 홍콩 등지에 비해서는 대단히 낙후돼 있습니다. 그에 따라 이곳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할까, 불만이 많은 실정입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도 중국은 이곳을 개발할 필요 가 있었던 것이며, 그것이 표면화된 것이 동북공정입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만들기 위해 유적과 역사연구자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 천문학적 돈이란 것은 중국 동북지역 경제개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총비용일 뿐이며, 개별연구자에게는 연구비가 지원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개하는 역사 프로젝트는 동북공정이라는 큰 틀에서 일부분일 뿐입니다. 따라서 경제개발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역사공정을 살펴야 하는데도 유감스럽게 큰 그림은 도외시하고 그 중 하나만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교수는 이번 고구려사 문제가 일본 역사교과서 사태의 재판이 될 수 도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는 10년 주기로 터졌습니다. 제 기억으로 80년대 초반에 처음 있었다가 10년 뒤에 재발했으며 최근에 또 있었습니다. 봅시다. 일본 역사교과서 사태가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무엇을 바꾸었습니까?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해결된 문제가 있습니까? 그 때보다 한일관계가 특별히 좋아졌나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나요? 독도 문제가 결판났나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왜 이런 답보상태 가 빚어지고 있는가를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이 교수는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고구려사 문제에서 진정으로 중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의 하나로 "천박한 자만심이나 무조건적인 우월의식과는 구별되는 진정한 자부심과 자강(自强)의식을 길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