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달러짜리 민족주의

“축구는 우리 경제력과 군사력을 대표한다. 우리는 일본을 추월할 것이다.” “일본에 끝까지 복수하겠다.” 아시안컵 축구 중국·일본 결승전 때 중국 관중들이 TV마이크에 대고 한 말이다. 민족주의 기세가 TV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팀이 4강에 진출하자 중국 TV가 우리 팀에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은 적이 있었다. 당사자도 아닌 중국 사람들이 한국팀의 4강 진출에 화가 난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 감정이 불거진 탓이라 볼 수밖에 없다.

요즘 중국에서는 툭하면 “중화 민족 만세”다.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은 한 예일 뿐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부추긴다는 말도 있지만, 올림픽 유치나 유인우주선 발사 처럼 내세울 게 있으니까 생기는 일이다.

사실 중국도 이제 밖으로 민족주의를 드러낼 만한 수준이 됐다. 중국이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을 하면서 수천만명이 굶어죽을 때 고구려가 중국 것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미국 CIA는 중국의 국민 소득을 구매력 기준으로 5000달러 정도로 평가한다. 상하이는 자본주의식 계산으로도 5000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쯤 되면 한(恨)처럼 맺혀 있던 민족주의가 밖으로 튀어나오게 돼 있다. 다른 나라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물론 우리도 그랬다. 그래서 요즘 중국을 보면 우리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 같다. 우리도 “못 먹어서” “약소국이어서”라는 한(恨)이 입버릇이 된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소득이 올라가자 동남아에서 안하무인 추태 관광을 벌이고, 백두산에 가서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과거엔 지나쳤던 미국 사람들의 ‘무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돈 벌러 온 외국인들을 천시했다. 지금 베이징 올림픽에 온 나라가 목을 맨 중국을 보면 10여년 전 서울 올림픽 때 누가 흠을 볼까 노심초사하고, 작은 일을 갖고 외국 팀에 분노하던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우리도 그렇게 5000달러짜리 민족주의를 지나온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중국 수준의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선진국형 2만달러 민족주의로 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5000달러~1만달러~2만달러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레 민족주의를 국제화·세련화시켜 갔는데 기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선 거꾸로 몇 천달러짜리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우리 집권당 의원들은 입에 ‘민족’을 달고 다니고 어느 당내에선 당 이름을 ‘민족민주당’으로 바꾸자는 얘기가 나왔다. ‘민족 정기’ 반대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난데없이 이를 내세우며 남을 공격하는 정치선동이 벌어지고 있다. ‘민족 공조’라면 북한 핵(核)처럼 생존권이 걸린 문제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환상도 떠돌고 있다.

선진국 사람들도 민족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에 담고 밖으로는 세련된 문화로 표출한다. 침략적 민족주의로 나갔던 일본조차 아직 잔재는 남아 있지만 외국인들이 혹할 정도로 민족주의를 세련시켜 가고 있다.

왜? 5000달러짜리 민족주의를 내세우다가는 세계의 존경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진짜 중요한 고급상품·고급문화를 다른 나라가 절대 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앞으로도 지키고 가꿔야 할 에너지원이다. 이 에너지의 물꼬를 어떻게 트느냐에 우리가 2만달러로 가느냐 주저앉느냐가 달려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물꼬를 앞이 아닌 뒤쪽으로 트고서 5000달러짜리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

(조선일보 / 양상훈 정치부장 2004-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