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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와 성종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한·중 간에 역사 분쟁이 일어나면서 고려 시대 거란족의 침공을 ‘세 치의 혀’로 물리친 서희 장군이 새삼스럽게
조명을 받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네티즌들은 서희를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위인으로 꼽으면서 중국의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에 대해 정부가 과거
서희가 보여준 것과 같은 외교적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서희가 19세에 갑과(문과)에 합격한 문관이면서도 장군 호칭을 갖게 된 것은 993년(성종 12년)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의
소손녕을 외교적 담판으로 설복시켜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여진족에게 빼앗겼던 압록강 일대의 땅을 되찾아 오히려 고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위업을
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소손녕은 고려 침공의 첫째 이유로 자기네 땅인 옛 고구려 지역을 고려가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했다. 마치 지금의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이에 대해 서희는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쓴 것이나, 서경(평양)을 수도로 정한 것 등을 근거로 들면서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당당히
주장하며 맞섰다. 우리 역사상 외교력만으로 외적을 물리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 담판은 서희의 뛰어난 언변과 협상력,
정세
판단력, 책임감, 용기 등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서희,협상을 말하다’·김기홍).
하지만 성종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성종은 조정 대신들의 다수 의견이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내주고 강화를 맺자는
‘할지론’으로 굳어가던 상황에서 일단 거란과 맞붙어 보자는 서희의 소수 의견을 받아들였다.
성종이 국토가 유린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승산 없는 도박과도 같은 모험을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서희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정체성을 무너뜨린 군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까닭도 있지 않았을까. 태조 왕건의 손자로서,
고구려의 실지 회복이라는 건국 이념을
받들기는커녕 오히려 발해를 멸망시킨 원수인 거란에게 제 손으로 땅을 떼어주는 치욕은 죽기보다 싫었을 터이니.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정부가 강경 대응을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 실리적 계산 때문인 듯하다.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북핵 문제 해법이
꼬이거나, 국내 경제에 손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등등. 명분을 지키려고 전쟁의 참화까지도 불사했던 성종은 무모하기만한 임금이었을까.
(국민일보 / 김윤호 논설위원 200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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