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고조선 겁나 쌓은 장성 연결한 것

1. 고조선 국가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역사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은 역사학에서 중요한 분야이다.
두만강 압록강과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 중국 훈춘과 요하-송화강유역 등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지방을 포괄한 고대 우리나라의 국가들은 원시사회가 분해 된 다음 생긴 주권 있는 나라였다.
많은 학자들은 고대 역사를 연구하면서 당시 자료가 없던 것을 위안 삼아 특히 영토와 영역 문제에 있어 자기 민족이나 국가이익에 부합 되도록 서술한 우려를 범하고 있다.
기자는 당시 역사속 기록자의 입장에 서서 사실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고대사 문제는 어느 특정국가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 국가 자체와 지역 역사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이 당시의 역사를 자기쪽으로 끌어들일 경우 인접국들간에 엄청난 갈등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성립

두만강 압록강과 더불어 중국의 요하-송화강 유역에 이르는 곳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고대문화가 발생한 선진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000년기에 이르러 점차 모계씨족제도가 부계씨족제도로 넘어가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000년기초에 이르러 부계씨족제도는 이미 확립됐다.
이 시기는 청동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시공동체가 붕괴되고 고조선이 성립되었던 시기였다.
주민들은 2000년기 말에 점차 계급사회를 이루면서 여러나라들을 형성하고 살았다.
따라서 고조선 사람들은 우리나라 옛 유형사람들의 후손들 중 한 부류였다.
우리 선조들은 주로 해(태양)신을 숭배했으며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등의 나라들 또한 건국시조들을 하늘신의 아들이나 후손들이라고 건국설화들은 전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처음에 우리 선조들이 불러온 명칭을 그대로 음을 따서 한자로 각이하게 썼으나 그 후에는 점차 우리 조상들을 멸시하여 짐승을 가리키는 한자 부수를 첨가하여 쓰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조상들은 동북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에 퍼져 살았기 때문에 언어생활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고조선의 건국시화에서 전하는 건국자의 명칭 <단군>은 ‘박달임금’이란 뜻이다.
‘박달’에서 박은 종족의 명칭이고 달은 이 종족이 살았던 고장(산)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 종족의 명칭만을 들어 단군의 의미를 표기하면 <박족임금>이 되고 그들이 산 고장까지 명시하면 종족의 명칭을 표기하는 경우에는 <박달족 임금>이 된다.
그러나 종족 명칭의 발상지인 <조선(고조선)>이란 이름은 ‘밝음’ ‘광명’의 의미를 뚜렷이 나타내는 명칭이다.
또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사용한 이름이라는 뜻을 고려할 때 고대 우리 조상들을 통틀어 <고대 조선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만강 압록강, 러시아 연해주 중국 훈춘, 요하- 송화강 유역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살고있던 초기 고조선 주민은 고대조선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고조선 국가가 성립된 두만강 압록강과 요동지방은 비옥한 지역으로 일찍부터 농업이 발전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기원전 2000년기에 청동도구로 목제농기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생산도구를 개발해 경지면적을 늘리고 노동생산 능률을 높여 농업생산을 더욱 늘렸다.
이 시기 청동기가 생산되면서 청동야금업이 점차 독자적인 수공업 분야로 전환- 발전돼 농업에서 수공업으로의 변화과정을 촉진시켰다.

2) 단군신화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사실을 오랜 옛날부터 전해주고 있으며 우리민족 유구한 역사에 대해 말해왔다.
단군신화의 형성시기는 고조선 건국과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선조들은 원시사회 때 공동체 추장의 권위를 신성화 할 목적으로 추장을 하늘신으로 묘사하고 이 하늘신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다는 웅신화가 창조됐다.
<단군신화>는 우리 선조들이 원시설화 유산들을 바탕으로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전한 것이다.
고조선 사람들은 건국자 단군을 하나님의 아들처럼 신비한 존재로 내세워 모셨다.

3) 영토

고조선의 영역은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두만강 압록강과 인접한 대륙지역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곳은 다른 곳 보다 비교적 따뜻한 지역인 압록강과 인접한 요동지방인 서변으로 역사가들 또한 두만강 쪽보다는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유적에 근거한 연구에 몰두했다.
상대적으로 한반도와 거리가 멀었던 두만강 인접 지역은 연구대상에서 멀어진데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과 마주한 곳인 만큼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소외됐다.
만리장성을 경계로 고조선과 대치하고 있었던 중국 종족은 연나라, 조나라, 진나라, 한나라 등이었다는 사실은 사기 ‘조선전’ 등에 언급된다.
중국 종족을 첫 통일한 진나라는 연나라와 조나라 등이 고조선을 경계하여 쌓은 장성들을 연결하고 보수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많은 역사 사료들이 가르쳐 주고 있다.

4) 사회경제

고조선은 넓은 지역에서 농업과 축산업, 청동주조업과 목공업 등의 수공업과 그 밖의 여러 생산부문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두만강과 압록강 및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훈춘 그리고 요하- 송화강 유역에 이르는 비옥한 지대와 강과 하천 주변에는 이전부터 벼 조 기장 수수 콩 등 5곡을 비롯한 작물들이 다양하게 재배됐다.
특히 당시 사회에서 기본 생산부문을 이루고 있는 농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청동제 도끼류와 같은 금속제 공구류의 보급은 급속히 늘어난 경작지 개간 작업 등에 필요한 농기구들을 개발해 비옥한 땅의 농업을 더한층 발전시켰다.
나무로 만든 농기구는 가지가 둔각으로 뻗은 참나무로 만들었다.
그 생김새는 굵은 대의 한쪽면을 평탄하게 깍고 그 끝을 깍아서 끝이 뽀족한 날을 만들고 날과 날이 달린 대와의 사이 경사진 턱에는 갈이한 흙을 한쪽으로 뒤집도록 하는 장치를 고정시킬 수 있도록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대의 등 부분에는 농기구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장치를 고정시키기 위해 세우는 부속을 박을 수 있게 3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많이 알려져 지혜로운 민족임을 보여줬다.
돼지와 개 닭 등은 일찍부터 길들인 짐승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돼지는 영양가 높은 식료품을 제공해 주는 집짐승이었으므로 많이 길렀다.
소는 식용고기 생산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논갈이 등을 하는 동물로 널리 길들여진 귀중한 집짐승이었다.
말은 수레를 끌거나 전쟁에서 중무장한 기마수들에게 높은 기동성을 제공해 준 위력한 공격수단이었다.
철기 제품은 대부분 전쟁용 도끼류이지만 얇은 철판으로 주조한 쇠 괭이류를 비롯하여 쇠 낫, 쇠 반달칼, 쇠 비수, 쇠 호미, 쇠 갑옷쪽, 고리달린 쇠 단지, 활촉, 단검과 장검, 창 등과 같은 철기도 대부분 주강 제품일 것으로 보인다.
재능있고 근면하며 지혜로운 고조선 사람들은 각종 기와와 질그릇 등 요업도 발전시켰으며 더욱 능률적이며 복잡한 직조기도 만들었다.
또한 고조선 사람들은 일찍부터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쳐서 명주실을 뽑아 여러 가지 고운 비단천을 짯으며 삼을 심어 베천을 짰다.
가축가공업도 발전시킨 고조선 사람들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는 바로 호랑이 가죽과 표범가죽 등으로 다른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여러 가지 농기구들과 베틀, 수레, 선박 등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가구와 일용품을 만드는 수공업도 발전시켰다.
특히 나무로 만든 접시로 음식그릇을 제작해 보급했다는 것은 나무로 생활용품들을 만드는 수공업이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고조선 사람들은 철기가 보급되고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상업과 무역의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상업과 무역이 발전한 것은 상품 유통 수단인 화폐가 널리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통치기구

고조선은 국가의 최고주권이 국왕에게 속해 있었고 군주의 지위는 세습적이었다.
안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통치기구를 거머쥐고 전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밖으로는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과 외교 등을 직접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 밑에는 여러 부류의 중앙관직이 있어 백성들을 엄한 법으로 다스렸으며
침략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상비적인 군대 또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6) 고조선과 중국 서주와의 관계

일찍 고조선은 중국 서주 왕조와 정치 경제면에서 직접적인 연계를 맺기 시작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예맥족을 중심으로 하는 고조선 주민들은 오늘의 중국 요녕성 서부 대릉하(大陵河) 유역으로부터 한반도 서북지구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이전 고조선 사회는 문헌자료 그대로 원시공동체 말기 단계에 처해있었다.
기원전 21세기의 하조로부터 노예사회에 들어간 중국은 은상의 발전시기를 거쳐 서주시기에 와서는 전성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1066년에 주무왕은 주(紂:은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폭군)를 토벌하는 전쟁을 일으켜 상조를 멸망시키고 서주를 건립했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 국내의 정치국면은 혼란했고 토착민들의 반항이 심했다.
이런 정황에서 통치계급은 진압과 회유를 겸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들은 은나라 사람으로 은나라 사람을 다스리는 분화정책을 취했는데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을 동방의 은족의 옛곳에 보내 통치하게 하고 자기의 형제들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 등을 파견하여 감독하게 했다.
주무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성왕이 나이 어렸기에 무왕의 동생 주공단(周公旦)이 섭정했다.
이에 불만을 느낀 관숙은 무경과 결탁하고 또 동방에 있는 서(徐), 엄(奄), 포고(蒲姑) 등과 연합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이동한 3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주공은 반란을 평정하고 무경과 관숙을 살해하고 채숙과 곽숙을 유배보냈다.
그리하여 주조의 세력은 황하하류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후 주공은 동방을 통제하고 은의 ‘완민(頑民)’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을 낙읍(洛邑)에 강제로 이주시켜 집중시키고 그곳에 동도(東都)를 세웠는데 이를 ‘성주(成周)’라고 불렀다.
주공은 8개 사의 병력을 <성주>에 집결시켰으며 아울러 성주를 주조가 동방을 통제하는 정치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왕족, 공신들과 전대의 귀족들을 각지에 보내 제후로 분봉하고 제후국을 세웠다.
제후는 주황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했고 주왕에게 재물을 바쳐야 했으며 병사를 거느리고 주왕을 따라 싸움에 나서야 했다.
주조가 분봉제도를 실시한 목적은 친척으로 나라를 세우고 제후들로 왕실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는데 매개 제후국들은 모두 낙읍을 본받아 종족노예를 통치하는 제도를 건립하고 이 제도로써 주왕을 보호하는 작용을 해야했다.
중국의 노예제도 시대에 있어서 분봉조공제도는 노예제 국가가 그에 소속된 후백(侯伯)과 부족에 대하여 정치 경제 면에서 지배와 종속관계를 유지하는 한가지 중요한 방식이었다.
서주왕국의 건립과 더불어 주천자(周天子)는 자기를 이른바 천하의 지배자로 간주했다.
때문에 서주왕국영역에서 실시된 분봉제도는 주위의 다른 민족과 부족에까지 확대되었다.
서주시기 국왕은 인근지구의 민족과 부족의 수령들을 책봉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서주왕실에 조공하게 하고 서주왕조의 신하가 되게 했다.
그리고 문화면에서 그 시기 주위의 각 민족은 중원의 서주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서주에 종속돼 있었지만 계속 자기들의 생산방식과 사회제도를 보존하고 있었다.
한편 고조선은 서한시기에 숙신(肅愼), 융적(戎狄) 등 민족과 함께 역시 중국왕조 책봉체제 가운데 일원이 돼 그 수령은 ‘조선후(朝鮮侯)’로 봉 받고 서주 왕조에 조공했다.
<상서대전- 홍범(尙書大殿- 洪範)>,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등 사서에는 기자(箕子)와 그의 후예를 <조선후>로 봉하고 기자가 서주왕조에 조공한 일을 기재했다.
그러나 고조선은 당시 변경에 살고있던 다른 민족으로서 서주왕실에 대하여 기타 제후국들처럼 주천자에게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왕실의 정령, 형법 및 경제제도도 고조선의 사회내부에 미치지 않았다.
<순자-정론편(荀子-正論篇)에는 “그러므로 중원의 각 국은 공봉(供奉)하는 것이 같고 제도가 같으며 먼 속국은 공봉하는 것이 같고 제도가 다르다”고 했다.
기자조선설은 여러면에서 볼 때 그 진실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많고 아직까지 명확한 정론이 없다.
하지만 서주시기 중국왕조와 고조선은 국제정치 관계면에서 대등 관계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은조 말기와 서주초기에 중국과 고조선 두나라 백성들 사이에 접촉과 연계가 있었다는 것은 또 두나라의 많은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증명할 수 있다.
1941년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소성자(小城子) 유적에서 은, 주 시기의 구리솥을 발견했다.
1955년에 북동촌 유적에서도 서주초기의 움에 보존되어 있던 동기무지를 발견했다.
1958년에 노합하 유적에서는 중원문화와 밀접히 관계되는 청동기를 발견했는데 그 연대는 동주시기에 상당하다.
요녕에서도 춘추말년부터 진한시기까지의 많은 무덤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중원지구의 것과 같은 질그릇과 동기가 많이 출토됐다.
조선경내에서 또한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중국의 요녕성에서 출토된 동기와 아주 비슷하다.
기원전 11세기 은, 주의 교체기에 중국인은 조선인과 이미 광범한 접촉과 연계가 있었고 아울러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에 이주해 정착했다.
이리하여 양국 주민들은 동일한 문화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7) 고조선과 중국 춘추시기 제나라와의 무역왕래

기원전 770년에 주평왕이 낙읍에 동천한 때부터 기원전 476년까지의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기이다.
춘추시기는 중국사회가 노예사회로부터 봉건사회에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춘추시기 중국과 고조선 두나라의 접촉과 연계는 무역왕래에서 돌출하게 표현된다.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성 동북구의 부유한 동방대국이었다.
서구초기에 주왕은 친척에게 분봉을 주었는데 강태공 여상에게 포고지구(지금의 산동성 임치일대)를 분봉주어 제나라를 세웠다.
춘추시기에 들어서서 주왕실은 날로 쇠약해지고 제후들 사이에 겸병전쟁이 빈번했다.
그리하여 주천자는 실제상 제후들에게 통제되었다.
일부 제후들은 패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주천자를 끼고 그의 이름으로 기타 소국의 제후들을 좌지우지했다.
제나라는 기원전 685년에 제환공이 즉위하자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정을 개혁하고 주위의 소국들을 겸병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제환공은 ‘주왕을 존중하고 이족의 진공을 물리치자’는 기치를 내걸고 제나라의 세력을 발전시켰다.
그는 연나라를 원조하여 산융의 진공을 물리쳤으며 위나라를 도와 위나라를 침범하는 적인들을 격파하였으며 허다한 작은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주왕에게 조공하지 않는 초나라를 토벌했다.
기원전 655년에는 중원지방과 산동북부에서 세력을 통일한 후 송, 진, 채, 정 등 제후국과 함께 <맹약>을 체결하고 제일먼저 제후들의 패자로 되었다.
이 시기 고조선은 제나라와 무역을 했다.
당시 제나라는 바다길을 통하여 고조선으로부터 범가죽과 털가죽으로 만든 의복 등 각종 특산물을 수입했다.
이러한 물품가운데서 특히는 고조선의 각종 특산물을 수입했다.
이러한 물품들 가운데서 특히는 고조선의 범가죽이 중국의 중원지대에서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의 <관자> 등 책에서 ‘조선의 범가죽’을 자주 언급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얼룩무늬를 띤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으로서 조선의 극히 진귀한 특산물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제일 오랜 사전이 <이아>에는 ‘동북이 좋은 것은 척산에 범가죽이 있는 것이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척산은 바로 지금의 산동성 영성현 해안에 있는데 <수서- 지리지>와 <태평환우기> 등 책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척산은 바닷가에 있는 작은 산으로서 호랑이와 표범이 없었다.
당시 제나라의 척산은 유명한 항구였는데 고조선 범가죽의 집산지로 이름났다.
<관자- 규도>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있다.
“환공이 ‘내가 듣건대 해내의 진귀한 화폐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일곱가지가 있다는데 나한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고 물으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음산에서 나는 연민을 사용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고 연땅의 자산에서 나는 백금을 사용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고 발화조선에서 나는 얼룩무늬를 띤 가죽을 사용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고 여수와 한수에서 나는 황금을 사용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고 진땅의 명산에서 나는 청동을 사용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고 우씨의 변산에서 나는 옥돌을 사용하는 것이 한가지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다”
전국초기에 이르러 제나라는 중원의 강대한 패권자가 됐다.
그러나 고조선은 제나라의 신하로 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조공하지도 않았다.
<관자- 경중갑>에는 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발화조선이 조현하러 오지 않으면 그들의 비싼 범가죽과 털가죽으로 만든 의복을 화폐로 하십시오. ~한장의 표범가죽은 가치가 천금에 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화폐로 한다면 8000리 밖의 발화조선은 조현하러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춘추시기에 제나라의 고존선간에 밀접한 해상교통과 무역왕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제나라의 척산은 고조선과 바다를 사이두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중국과 고조선 두나라가 친선을 강화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8) 고조선의 쇠퇴와 진개(秦開)의 고조선공략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은 중국의 전국 시기로서 봉건사회가 시작된 시기이다.
춘추시기의 장기간의 치열한 패권쟁탈전쟁을 거쳐 전국시기에 이르러서는 주요한 제후국인 제, 초, 연, 한, 조, 위, 진 등 7개 나라가 남았다.
이 나라들은 역사에서 <전국 7웅>이라고 한다.
패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이 7웅은 춘추시기에 비하여 더욱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전국초기부터 고조선사회는 중국 중원지구의 금속문화(청동기,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사회경제문화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약 기원전 5세기 전후에 이르러 고조선은 노예제 사회에 들어섰으며 국가체제를 형성했다.
때문에 중원 및 변경지역의 제후국들이 서로 다투어 왕으로 칭할 때 고조선의 제후들로 중국식 왕호를 본받아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이에 대하여 <삼국지> 위서 한조에는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있다.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 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으로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려가 간하므로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려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그만두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전국초기에 고조선은 주왕실이 쇠퇴해지고 여러 제후국들이 제패하기 위하여 해마다 계속 싸우는 기회를 타서 서쪽으로 부단히 세력을 확장했다.
이리하여 고조선은 요동지구를 쟁탈하기 위하여 부근의 제후국인 연나라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연나라는 서주초기에 분봉한 나라로써 도읍을 계(오늘의 북경)에 정하고 하북북부와 동북서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국시기의 연나라는 대국으로서 수천리의 땅을 차지하였고 수십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기타 열강에 비하여 국력이 강하지 못했다.
기원전 4세기 말에 국내에 내부분쟁이 생기고 게다가 또 제나라의 공격을 당하고 진나라와 싸우는 과정에 국력이 더욱 쇠약해졌다.
그러므로 전국초기에 그 동북지구는 고조선과 동호의 끊임없는 침입과 교란을 당했다.
연나라는 고조선의 침입을 방지하고 격퇴하기 위하여 이따금 부근의 강국인 제나라와 연합하여 고조선에 대처하거나 고조선을 들이쳤다.
이를테면 <사기- 제태공세가>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23년에 산융이 연을 침략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제환공은 연을 구원하기 위하여 산융을 토벌하였는데 고죽국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관자- 대광- 소광>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환공은 북으로 영지국을 토벌하고 하도지산을 쳤으며 고죽국을 빼앗고 산융을 가로막았다>.
<북으로 산융을 토벌하고 영지국을 통제하고 고죽국을 빼앗으니 여러 동방종족들은 비로소 복종했다>.
<환공은 북으로는 고죽국, 산융, 예맥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위에서 말한 고죽국이 바로 고조선의 서부지구 즉, 오늘의 요서와 요동 지구이다.
전국중기 연조왕때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 경제 군사 등 제방면의 개혁을 진행한데서 연의 국력은 강성해졌다.
연나라는 또 대외에 강대한 공세를 발동하여 제나라와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방의 강국이 되었다.
기원전 300년에 연조왕은 요하상류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동호를 원정하는 한편 명장 진개를 파견하여 고조선을 향해 대규모적인 진공을 발동하여 요동지구로부터 한반도 서북부인 압록강유역에 이르는 2000여리의 땅을 강점했다.
진개가 벌린 고조선과의 전쟁은 고조선 역사에서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강했던 고조선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쇠퇴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연나라는 동호와 고조선을 물리친 후 당지에 장성을 쌓고 군현을 설치했다.
<연나라도 조양으로부터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군을 설치했다>.
연나라가 쌓은 장성은 조양 오늘날의 하북성 회래로부터 양평 오늘의 요녕성 요양까지인데 연나라의 북쪽 장성이었다.
지금의 만리장성 기초공사는 고조선 등의 더 이상의 남쪽 진출을 막기위해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개 군을 설치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하여 연나라의 세력은 한반도의 서부지구에까지 뻗게 되어 동호족도 경계하고 고조선도 제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고조선의 통치자들은 연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
전국시기에 중국의 화북과 요녕지구에 자리잡은 연나라와 고조선과의 무역왕래는 더욱 빈번했다.
두나라의 무역노선은 주요하게 육로를 통했다.
이 때 중국은 철기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였기에 사회대분공을 촉진하였고 공상업이 이미 상당히 발달했다.
두나라 국경이 인접되었기에 백성들의 왕래가 빈번하였고 무역이 번영했다.
연나라의 금속화페인 명도전과 각종 금속도구가 일찍이 대량적으로 조선에 수송되었다.
지금 한반도 내에서 발견된 명도전 가운데의 일부분은 이시기에 두나라의 무역왕래를 통하여 조선에 수송된 것임이 틀림없다.
자강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등에서 발견한 중국 전국시기의 화폐와 각종 금속도구는 이시기 두나라간 무역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자강도 위원군 용연동에서 일찍이 약 400잎 되는 명도전과 함께 동으로 만든 화살촉 띠고리와 철로 만든 화살촉 칼 창 도끼 삽 낫 반월도 등 금속도구가 출토됐다.
자강도 강계군 진천면 중암동에서 약 250잎의 명도전이 출토됐다.
강계군 화경면 길다동에서도 약 4000잎의 명도전이 출토되었다.
평안남도 영원군 온화면 온양리에서는 명도전과 포전이 출토됐다.
이외에 한반도 서북부의 일부 지방, 심지어는 남쪽에서도 명도전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서 일부분은 두나라의 무역왕래를 통하여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고 다른 일부분은 전국말기에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하는 봉건겸병전쟁과 진조말기, 한조초기의 대동란 과정에 피난하여 고조선에 이주한 연나라 등 사람들이 가지고 온 것이다.
철기를 비롯한 중국대륙 금속문화의 대량적인 도입으로 한반도의 사회발전은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세계일보 / 남창룡 기자 200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