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 받았다고 고구려가 중국 지방정권 아니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요한 근거 중 한가지는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민족정권'라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책봉을 받는다고 해서 곧 변방민족정권(지방정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역사적 진실에 정면으로 상치(相馳)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규명하기에 앞서, 동양과 서양의 외교가 서로 판이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대 외교는 서양식 외교다. 30년 전쟁(1618∼1648)과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 이후에 성립된 서양식 외교가 19세기 말 동양에 전파되어 오늘날에는 보편적인 외교가 되었다. 그러므로 19세기 이전의 동양 외교를 인식할 때에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서양식 편견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서양식 외교에서는 모든 국가를 평등하게 취급한다. 크건 작건 간에 모두 똑같은 주권 국가로 대우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UN에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에게 거부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EU 이사회의 경우에는 중요 사안에 관해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에게는 10표를, 기타 국가들에게는 각각 8표·5표·4표·3표·2표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양식 외교는 형식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차등적인 것이다.

반면, 과거 동양의 외교는 이와 달랐다. 외교 형식에 국력의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 간의 신분적 차별이 존재했던 것처럼, 과거 동양에서는 국가간 차별도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래서 강대국은 강대국으로, 약소국은 약소국으로 대우했다. 강대국을 강대국으로 대우하는 것을 '사대(事大)'라 했고, 약소국을 약소국으로 대우하는 것을 중국에서는 '자소(字小)', 한국에서는 '교린(交隣)'이라 했다. 어차피 차등적인 것은 다 마찬가지였지만, 서양에서는 실질적으로 차등적이었던 데 반해, 동양에서는 형식적으로도 차등적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형식적 차별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책봉(冊封)'이었다. 책봉이라 함은, 강대국 군주가 약소국 군주를 특정 관직에 봉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책봉을 받으면 종속국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 책봉의 실태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한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본질적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중국 측은 남북조 시대)에 중점을 두되, 한나라∼청나라 시기를 전반적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1. 책봉은 군주의 임명 요건이 아니었다.

이 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서양국제법상의 국가 원수 승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혁명이나 쿠데타에 의해 새로운 국가 원수가 취임하면, 타국은 그를 국가 원수로 승인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 원수는 혁명이나 쿠데타 후의 국내 절차에 의해 통치자가 되는 것이지 타국의 승인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국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타국에 대해 자국을 대표하고 타국과 국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책봉 역시 이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중국의 책봉을 받는 고구려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군주가 된 것은 국내 절차에 의한 것이지 중국의 책봉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책봉을 받음으로써 중국에 대해 자신이 고구려 군주임을 주장할 수 있고 중국과 국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장수왕의 경우를 보자. 장수왕은 413년 동진(東晋)으로부터 정동장군으로, 420년 남송(南宋)으로부터 정동대장군으로, 435년 북위(北魏)로부터 정동장군으로, 463년 남송으로부터 거기대장군으로, 479년 남제(南齊)로부터 표기대장군으로 책봉 받았다. 그런데 책봉은 장수왕의 임명 조건이 아니었다. 단지 장수왕을 고구려왕으로 인정하고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중국 측의 의사 표시에 불과했다. 그가 책봉을 받은 것은 중국 왕조와 관계를 개설하거나 혹은 강화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일본도 왜오왕시대(倭五王時代, 413∼478)에 남송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이때 일본왕은 신라·임나(任那)·진한(辰韓)·모한(慕韓) 등에 대한 도독권(都督權)을 인정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왕은 그러한 도독권을 행사한 적이 없으며, 남송 역시 일본에게 도독권을 부여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용 없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1992년 대한민국은 중국 전역의 합법 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대만에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다. 이와 정반대로, 그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중국 전역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지만, 그 승인을 받은 대만의 총통이 본토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한 것도 아니었다. 1948년 UN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지만, 대한민국의 주권은 북한 지역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직책에 책봉을 하였다고 하여 실제로 그 직책에 임명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남송은 왜 일본에게 위와 같은 직책을 주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도독권을 인정받음으로써 정권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고, 남송은 일본과 제휴하기 위해서 의미 없는 직책을 가지고 인심 한번 쓴 것에 불과한 것이다.

2.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국가적 자율성이 침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으려면, 책봉을 받은 이후 고구려의 자율성이 중국에 의해 침해되었어야 한다. 자율성이 침해되었다고 할 수 있으려면, 고구려가 내정 간섭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중국 법률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거나 혹은 중국에 대해 납세나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고구려와 중국 사이에 이러한 사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하였으니 중국에 조세를 납부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조공이 동아시아의 특유한 무역 방식이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세금의 경우에는 정부가 반대 급부 없이 일방적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임에 반해, 조공의 경우에는 중국측이 그 반대 급부인 회사(回賜)를 하였다는 점에서, 거기에다가 일반적으로 반대 급부가 훨씬 많았다는 점에서 조공을 납세의 일종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중국의 책봉을 받은 이후 고구려는 자율성을 침해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력을 강화하였고 동아시아에서 2위 정도의 국력을 유지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한나라 말기부터 선비족과 함께 만주(당시의 요동)를 양분하였으며, 293년부터는 만주를 놓고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와 100여년간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313년 고구려는 낙랑군을 자국 영토에 편입하였다. 384년에 고구려가 만주 중서부를 장악하자, 중국의 후연(後燕)은 고구려를 저지하기 위해 광개토대왕에게 책봉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요동성을 점령하고 405년 후연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2년 후 후연이 멸망하자 만주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436년 북연(北燕)이 멸망한 후에는 만주 전역을 장악한 국가가 되었다.

과거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몽고나 청나라의 경우처럼, 만주의 지배자가 뒤이어 중원의 지배자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에는 만주를 지배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원까지 국력을 뻗치지 못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남쪽에서 백제·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한 것과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중국의 책봉을 받은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책봉과 무관하게 고구려가 국가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동아시아 제2위의 강대국을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어떤 국가를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3. 중원왕조도 책봉을 받은 적이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중원왕조만 책봉을 준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주던 것이 책봉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원왕조도 힘이 없을 때에는 책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127년에 송나라는 여진족 금나라의 책봉을 받았는데, 여진족은 1117년 이전까지만 해도 고려의 책봉을 받았다. 정통 중원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변방의 이민족에 불과하던 존재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랑캐는 바로 이 여진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원왕조가 오랑캐의 책봉을 받았다고 한다면, 책봉에 관한 우리의 기존 상식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그릇된 상식을 정확한 지식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4. 중국만 책봉을 준 것이 아니었다.

책봉은 강대국이 주는 것이었다. 강대국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한국 왕조도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에게는 책봉을 주었던 것이다. 고려는 1117년까지 여진족에게 책봉을 해 주었다. 그 뒤 여진족은 병자호란 때 우리에게 심전도의 치욕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그 직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책봉을 받고 있었다.

고구려가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엉뚱한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다름 아니라, 만주 땅에 살던 여진족이 고려와 조선의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도 만주가 한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주장한다면, 중국이 과연 이를 수용하겠는가?

5. 한 국가가 여러 국가의 책봉을 동시에 받은 경우도 있다.

1879년 3월 이토우 히로부미의 지휘하에 일본에 병합된 오키나와(당시의 유구)는 그 이전에 중국과 일본 양쪽의 책봉을 동시에 받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전에 여진족은 명나라와 조선 양측의 책봉을 동시에 받았다. 이 점은 고구려의 경우에도 발견된다.

고구려가 만주를 지배하고 있을 당시에 중국은 남북조시대였다. 남조와 북조가 정통성을 놓고 서로 경쟁하던 시대였다. 462년에 북조의 북위가 장수왕을 다른 나라 왕들보다 가장 높은 직책에 책봉하자, 463년 남조의 남송은 그보다 더 높은 지위인 거기대장군으로 격상시켜 장수왕을 책봉하였다.

책봉을 받음으로 인해 중국의 지방 정권이 되는 것이라면,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의 지방정권이었는가 아니면 남송의 지방정권이었는가? 이 점을 보아도, 책봉을 받는 것과 지방정권이 되는 것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패배한 국가의 책봉을 받은 사례도 있다.

요나라는 993년 제1차 고려 침공을 단행했지만, 고려가 요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고려의 강동 6주 영유권과 고구려 계승권을 인정한 후에 군대를 철수하였다. 사실상 고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었지만, 전쟁의 결과로 고려는 요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018년 요나라는 제3차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지만, 이번에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고려는 요나라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요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였다. 1107년 윤관이 이끄는 고려의 17만 대군이 여진족 촌락들을 함락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1108년 고려는 여진족의 완안부족연맹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전후처리 차원에서 고려는 1109년 여진족에게 책봉을 해주는 조건으로 동북 9성을 반환하고 말았다.

<대륙잡지>(大陸雜誌) 38-4호에 실린 왕치쫑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원인(豊臣秀吉朝鮮侵犯之原因)"이라는 글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원인 중 한가지는, 대륙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책봉을 주는 나라라고 해서 군사력이나 국제적 입지가 꼭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책봉을 받으려고 했던 것인가? 주변국이 중국의 책봉을 받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중국과 무역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주변국이 중국에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조공이라 했고, 중국이 주변국에 그 반대 급부를 제공하는 것은 회사라 했다. 바로 주변국들은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 책봉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7. 책봉을 하는 국가와 책봉을 받는 국가의 국제적 지위가 동일한 경우도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고구려는 북위와 남제로부터 동시에 책봉을 받았다. <남제서>(南齊書) 권58 동남이전에 의하면, 489년 북위가 주최한 외교 파티인 원회에서 고구려 사신과 동등한 예우를 받은 남제 사신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북위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도 있다.

8. 책봉은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현상이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만 책봉을 받은 것이 아니다.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것은 고구려만이 아니었다.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 그 일례로 미얀마·베트남도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가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말한다면, 일본을 포함한 세계의 무수한 나라들이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일본·미얀마·베트남 등 세계 각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왜 유독 고구려사를 거론하는 것인가?

9. 책봉을 주고받음은 정권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작은 나라 정권의 입장에서는 큰 나라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국내 권력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큰 나라 정권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창출함으로써, 국내의 정적들에게는 압력을, 일반 백성들에게는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사방의 이민족에게 둘러싸여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변방을 안정시킨다는 것이 정권 차원에서 여간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하루가 멀다 하고 휴전선에서 총격이 발생한다면, 아마도 남한 정권은 여론의 질타에 견디다 못해 다음 선거를 기약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왕조의 입장에서는 위협적인 이민족 정권에게 책봉을 해줌으로써 변방을 안정시키고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0. 책봉은 차등적 국제 질서의 창출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남북조시대의 남송은 421년 고구려왕을 정동대장군으로, 420년 백제왕을 진동대장군으로, 비슷한 시기에 일본왕을 안동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남송의 무관직에서 정동대장군은 가장 높은 장군직이었고, 진동대장군은 그보다 두 단계 낮았으며, 안동대장군은 진동대장군에 비해 한 단계 낮은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고구려·백제·일본의 왕들이 남송의 무관직에 취임한 것은 아니었다. 상징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차등적 책봉은 책봉을 받는 국가의 국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중원의 최강국을 중심으로 국력에 따른 차등적 국제 질서를 이루었던 것이다. 근대적 관점에서는 차등이니 차별이니 하는 것들이 봉건적 유물로 인식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는 차등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동양 사회에서 차별적인 예(禮)을 통해 사회적 질서와 평화를 이루려 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등적 국제질서 속에서는 각 국가들이 국력에 따른 처신을 하게 되므로 질서 내지는 평화가 도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완벽한 평화는 아니었다. 그리고 국력이 바뀌게 되면, 새로운 책봉을 받든가, 아니면 전쟁을 통해서 국력을 새로이 확인하든가 하였다. 중세 서양의 경우에는 기독교의 신이 유럽 사회를 보편적으로 지배했지만, 동양에서는 그러한 보편적 절대자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가급적 평화를 도모하자면, 최강국인 중원 왕조를 중심으로 질서를 창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중국측 주장은, 과거의 역사를 근거 없이 왜곡하는 반역사적 태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봉이 과거 동양적 특수 현실의 산물임을 잘 알면서도 이를 고의로 무시하는 중국의 태도는, 진실과 학문이 아닌 국익과 정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김종성 기자 / 사학과 대학원 중국 외교사 전공>

(오마이뉴스 200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