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고구려 천도

고구려는 왜 멸망했나. 여러 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고구려론’에서 평양으로의 천도(遷都)를 고구려 패망의 근본 원인으로 꼽았다. “압록강 북쪽은 기후가 일찍 추워지고 땅이 몽고와 맞닿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용감하였다. 또 강한 오랑캐와 섞여 살았기 때문에 사면으로 적국의 침입을 받게 되므로 방비가 매우 튼튼했다.”

그러나 평양은 달랐다. “압록강과 청천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산천이 수려하고 풍속이 부드럽고 연약했다. 그리고 밖으로 견고한 성(城)과 큰 진(鎭)이 겹겹이 방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의 이런 좋은 조건들이 오히려 다산의 장탄식을 자아내게 했다. “아아, 평양은 믿을 수 있는 곳인가.” 백성과 물자가 풍부하고 성곽이 견고했던 까닭에 위정자와 백성들이 안이함에 빠져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의 진(晉)나라와 송(宋)나라는 양쯔강(揚子江)을 남하하는 바람에 천하를 잃었고, 백제는 한강을 건넌 뒤 나라를 잃었다는 것이 다산의 해석이다.

만약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감행하지 않았다면 만주가 여전히 우리땅으로 남아 있었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겨 둘 일이다. 묘한 것은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려는 ‘제2의 고구려 침공’을 자행하고 있는 순간에 한국의 집권층은 수도를 한강 이남으로 옮기는 데 온통 몰두해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중국이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고구려 역사를 빼앗아가려고 하는데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조용하다. 오히려 8월 중에만 6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중국 방문을 예정하고 있을 정도로 정치인들의 중국 열풍이 뜨겁다. 이들의 중국 방문이 ‘역사 지키기’와 상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역사학자의 말을 끌어 올 것도 없이 역사 문제가 뜨거운 정치 외교적 쟁점이 되는 것은 지금도 우리가 겪고 있는 그대로다. 국내의 반대세력에는 집요하게 과거사를 들이대는 현 정권이 중국과 일본에는 왜 이렇게 고분고분한지가 의문일 뿐이다.

현 정권의 과거사 캐기는 유신시대와 6·25를 넘어 일제시대를 관통한 뒤 동학농민혁명에까지 이를 기세다. 기왕에 이렇게 스케일 크게 일을 벌일 요량이라면 아예 고구려 시대까지 파고들어 평양 천도의 책임자들을 가려내 역사적 단죄를 가하는 것이 어떨까. 민족사의 죄과로 따진다면 만주땅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보다 더한 잘못이 어디 있겠는가. 현 정권이 하겠다면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 / 김현호 논설위원 200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