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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동북공정' 맞서 남·북한이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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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릉인 장군총. 이전에는 그 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엄격한 관리와 보호가 이뤄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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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민족의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이른바 ‘동북공정’의 ‘역사 전쟁’ 시나리오에 따라 남과 북, 대한반도에 이미 선전포고를
시작했습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사회과학원 주도로 진행되는 5개년 연구 프로젝트로서 고구려사를 한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로 왜곡하기 위한 학술적
연구 및 근거 자료를 개발하는 국책 사업입니다. 그 연구비만 200억위안, 한국 화폐로 약 3조원이 투입되는 대규모의 국가 사업입니다.
이미 예상된 일이지만, 최근에 들어와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대한반도 역사 침략에 따라 한민족의 위대한 고구려 역사가 중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빼앗길 위기에 놓였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중국은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을
일제히 총력전으로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동북공정의 큰 틀 속에서 중국은 최근 외교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어, 일부 대학의 교양 역사 교재, 언론 매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중국사의 일부로 고구려사를 편입시키는 역사 왜곡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중국의 베이징대학이 출판한 대학 교재인 <중국 고대 간사>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에 복속된 지방 정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베이징대 장판 역사학과 교수가 2001년에 쓴 것으로서, 베이징대학이 공통 교양 선택 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는 '중국통사'의 고대사 부분의
교재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상하이의 푸단대학이 교양 역사 교재로 쓰고 있는 <국사개요>에서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관계를 실질적인 군신 관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푸단대학의 판수즈 사학과 교수가 지난 2000년 개정하여 저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연구소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의 인민출판사가 2001년 7월
발간한 권위있는 <세계 통사>의 7판인 고대편 연표에도 고구려를 포함한 한국의 3국 역사가 엄연히 외국 역사로 분류돼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사로 왜곡한 증거입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책인, 북송의 사마광이 저술한 <자치통감>에서도 고구려사를 중국의 외국사인 한국사로 기록했다는 것은
고구려사가 한국사란 것을 그대로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중국에서 발간된 고지도 책자인 <중국고대지도집> 영인본과
<중화고지도진품선집> 영인본 등 2종의 문건에서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함께 한국으로 표기된 지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중국고대지도집에 수록된 지도 중 청나라 때 제작된 <동남양각국연혁도>는 한반도에 대해 '조선' 표기와 함께 옛 왕조 명칭인
고구려-백제-신라를 병기했습니다. 심지어 청나라 때 만든 이 지도에는 현재 중국과 북한이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과 달리 두만강 이북 지역을
경계선으로 국경을 설정하고, 북간도 지역을 한반도의 영토로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중화고지도진품선집>에 수록된 송나라 시대 지도에도
한반도를 중국 영토가 아닌 '동이'(東夷)로 표기했으며, 그 안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함께 표기했습니다.
고고학적 측면에서 보아도, 기원전 3~4세기경 고구려 영토에서 나타나는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인 적석총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성곽을 쌓는 기술도 고구려의 한민족과 중국의 한족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족과 한민족의 조상은 돌을 다루는 기술 자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민족과 한족 간에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중국이 문제삼고 있는 시기 중 하나인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고고학적
공통점을 찾기 힘듭니다. 더구나 고구려가 중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는 것은 곧 고구려가 중국 내부의 소수민족의
정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사실과 진실로 보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의 역사왜곡 주장은 스스로 ‘모순’이자 ‘부당성’을 갖고 있음을
드러낸 셈입니다.
한편, 중국의 외교부가 얼마 전에 고구려사 왜곡의 일환으로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한국사를 한-중-일 3국의 고구려 관련 부분을 삭제하여 한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바 있었습니다.
최근에 또 다시 중국 외교부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일본의 국가 개황 중 약사를 뜻하는 간황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미 국제역사학계와 국제정치학계에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주장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사관이라고 평가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참으로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894년부터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 침략을 시작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한편,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국제적 혼란을 이용하여 중국침략을 추진했던
것을 정당화시킨 주장에 동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도 잘 알다시피, 일본제국주의는 1927년 5월 말, 중국 산동성으로 출병한 데 이어, 6월에 대중국정책의 기본을 결정하기 위한
동방회의를 11일간에 걸쳐서 개최하고, <대중국정책강령>을 결정하여 공표하였습니다. 그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1932년 3월, 만주국을
성립한 상태에서 1937년 말까지 중국의 수도인 남경의 점령 때 무고한 중국 인민의 20만명 이상을 학살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일본이 역사를 왜곡한 것처럼, 일제의 대중국정책강령의 결정과 만주국의 존재가 정당하다고 한국에서 그대로
인정하고, 한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려 놓는다면, 과연 중국인들은 그대로 인정하겠습니까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가장 큰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의 사실과 진실은 결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 이후 간도 지역에 대한 연고권과
국제법적 영토분쟁을 미리 예방하고자 고구려사의 왜곡을 감행하고 있지만, 고구려 역사와 간도 지역은 한민족의 역사와 진실로부터 결코 멀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한민족의 조상인 예맥족이 세운 나라이고, 간도 지역은 바로 고조선-고구려-고려-조선의 본토라는 것이 지금까지
세계역사학계의 정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09년 9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간도를 중국의 영토로 귀속시켰기 때문에,
만주 지역을 중국이 차지한 과정은 사실상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점에서 통일한국은 간도협약을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당연하고 충분한 국제법상 권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역사까지 중국사에 포함시키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평양의 대동강 이북 지역에 산재한
고구려 역사를 모두 중국사에 포함시키고, 심지어 고조선과 발해의 역사까지도 중국은 모두 흡수하려는 역사왜곡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이 한반도에 역사침략을 개시하였고 이미 중국과 역사전쟁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과 북은 중국의 역사 침략과 역사 전쟁에
대해 공동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이제부터 남북한은 남북공조를 통한 대비책을 마련하여 중국과의 역사침략에 대응해햐 할
것입니다.
남과 북이 공조하여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분석·축적·보존의 공동작업이라는 교류·협력성을 높이고, 지금부터 정부와 당국 차원에서
학계와 시민단체 등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남과 북의 학계에서는 고구려사의 연구 결과를 영문과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루투갈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전세계
학자들에게 중국의 역사왜곡 실태를 알려야 합니다.
시민단체들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각국의 시민단체들과의 연계망을 통해, 또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중국의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감시망
구축과 동시에, 한민족사의 사실과 진실을 적극 홍보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 침략에 대해 남과 북의 공조가 구체적으로 실천된다면 역사적 사실과 진실은 바로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우리 한민족이 승리하는
편에 설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 윤황 기자 20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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