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인정않는 사학계가 중국의 역사침략 불렀다”

제2차 고-당 전쟁 _ 중국측 논리 비판

지난 6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중국의 '고구려역사 침공'이 본격화되고 있다. 고구려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당국은 「고구려 역사 지식 문답」이라는 소책자까지 배포해가며 '한국 민족'의 역사적 강역을 한반도 남부에 제한하려는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측이 이런 과정을 통해 공식화하려는 역사 인식은 ▲고구려는 중국의 예속 정권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중앙 정권의 지방할거 정권에 대한 통일전쟁', 그리고 ▲'기자조선·위만조선은 북한 혹은 한국과 아무런 역사적 관계가 없다' 등이다. 고조선을 한국사에서 분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 출신이고, 위만은 한나라 출신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2004년 2월호에 게재한 역사학자 이덕일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 뿐 아니라 고조선까지 중국사에 포함시키려는 시도이며, 이엔 단군조선을 무시해온 한국 사학계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기사를 다시 한번 소개한다.(디지털말 편집자 주)

중국의 역사연구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으로 인해 ‘이러다 정말 고구려사를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도대체 무슨 논리로 우리 역사를 넘보고 있는지 우선 제대로 알고 비판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을 위해 『말』지는 한국역사의 대중화 작업을 선도적으로 진행시켜 온 역사학자 이덕일씨를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한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짜 대상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

기자의 첫 번째 질문인 “역사학자로서 동북공정에 대한 중국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이덕일씨의 답변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만약 중국이 한국의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 기준이 되는 영토(편집자 주: 중국은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대동강 북부로 지정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은 그 기준을 한강 이북으로 못박고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현재 북한의 영토 전체가 예전엔 중국의 것이었던 셈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 체제가 앞으로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을 것으로 파악한 것 같다. ‘동북공정’이란 작업을 통해 통일 이후, 미국을 상대로 북한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계산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더 나아가 이씨는 중국이 이처럼 터무니 없는 ‘공작’을 추진하게 된 데는, 역시 터무니 없을 정도인 한국 역사학계의 ‘자기 비하’ 탓도 크다고 주장했다. 국내 사학계의 단군조선에 대한 경시가 중국에 빌미를 줬다는 것이다.

단군 조선 없으면 고구려도 없다

보통 고조선이라면 시대순으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말한다. 그런데 이 중 한국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것은 기자조선부터다. 여기서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말기의 중국인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조선을 잇는 위만조선의 건국자인 위만(衛滿) 역시 연나라 출신이다. 이렇게 되면 고조선은 중국인이 세운 나라가 되고 이를 잇는 고구려 역시 ‘도맷값’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인식엔 문제가 많다. 우선 단군조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놓고 ‘단군조선은 없다’고 하면 저항이 거셀 게 뻔하니까 그렇게는 못하고, ‘한국의 청동기가 시작된 것은 BC 10세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야 국가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사학계의 통설이다.) 한국 사학계가 인정하는 BC 10세기의 고조선이란 기자 조선, 아니면 위만 조선을 칭하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기자와 위만은 중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니 고조선도 중국사에 포함시키겠다’고 해도 현재의 한국 사학계로서는 할 말이 없다.”

- 그렇다면 단군조선을 인정할만한 근거나 문헌이 있는가.

“‘단군조선’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다. 공간은 단군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나 하는 것인데, 만주에까지 뻗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이 그 증거다. 고인돌은 중국 요녕성에서부터 정약전 선생의 유배지였던 흑산도까지 널리 분포돼 있다. 같은 장례 풍습을 가진 집단이 중국 만주에서부터 한반도 남단까지 살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만주까지 진출했다는 소리다. 만주 이상의 지역에서는 더 이상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단군조선이 만주 일대까지 분포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이후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단군조선이 평안도 일대로 축소되고 말았다. 더욱 큰 문제는 건국 시기다. 일연도 BC 23세기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만주 지역에서도 BC 2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주류 사학자들은 이것 역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단군조선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고조선을 3조선이라고 한다. 단군-기자-위만조선을 총칭하는 개념인데 굳이 단군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보통 한국 사학계에서 고조선이라고 일컫는 것은 단군조선을 제외한 위만-기자 조선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기자조선은 실제 존재 여부를 두고도 상당한 논란이 있다. 단군조선을 인정한다는 것은 2천 년간 만주지역에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이후 중국에서 온 위만이 잠시 고조선을 찬탈했다 해도 ‘우리 민족의 첫 국가는 고조선’이라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고구려가 한나라의 지방정권?

이쯤에서 기자는 이덕일씨와 함께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의 논리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중국측은 “고구려가 중국 동북지역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므로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은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 중 하나는 이른바 ‘고구려’족이 예맥, 고이 등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민족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고구려를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볼 수 있는가.

“웃기는 소리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영토 안에 수립된 나라다. 당연히 고조선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중국의 영토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고조선이 강력한 구심역할을 할 때는 고구려나 발해와 같은 나라들이 나올 수 없었지만, 고조선이 무너진 뒤 그 영역 내에서 여러 세력들이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동북지역을 관할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현도군과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를 초기부터 ‘나쁜 놈’으로 묘사한 내용이 많다. 중국이란 나라가 원래 변방에서 등장한 세력에 대해 일단 인정하고 보는 식인데 고구려에 대해서만은 유독 부정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고구려가 건국 과정에서 중국의 행정기관들과 충돌하고 대립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변방의 다른 민족과는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족을 구성했다는 예맥 등 북방 민족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이 이런 주장을 들고나올 수 있었던 것에는 관련 분야의 연구를 방치해 온 한국 사학계의 잘못이 있다.”

중국측은 또 고구려가 한사군(한나라가 동북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세운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등 4군을 통칭) 지역 내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중국이라는 것이다.

“고조선의 지배층은 국가가 무너진 뒤에도 옛 고조선의 강역 중 상당 부분을 계속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토양 위에서 부여나 고구려, 옥저 들이 형성된 것이다.”

- 중국측이 한사군을 들먹이는 이유는 고조선의 강역이 중국에 완전히 편입됐으며, 고구려는 이렇게 중국 영토가 된 지역에서 건국되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사에 귀속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선생님 말씀은 고조선이 무너진 뒤에도 기존 지배층이 지배를 유지했다는 뜻인데, 근거는 있는가.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전쟁 결과를 보면 된다. 사서에는 한나라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들은 모두 사형을 당하거나 사형 판결을 받은 채 거금을 내고 목숨을 건졌다. 중국의 경우 이민족과의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면 제후로 봉해지는 것이 실례다. 그런데 사마천마저 ‘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 중 한 사람도 제후에 봉해진 자는 없었다’고 특별히 기록할 정도였다.”

중국 사서를 그대로 믿지 말라

중국측은 한반도 서북쪽에 있었다는 한사군을 들어 한나라의 통치가 한강 이북까지 뻗쳤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한사군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도 기록한 바가 없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일부 지역에만 설치돼 있었거나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후대에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든 장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우스운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사군의 이름을 모두 외웠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학계에 식민사관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설사 한사군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게 우리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달달 외워야 했는지 의문이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있었다고 쳐도 만주 지역이라고 말했는데 후대 주류 사학자들이 이를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 문제다.”

- 중국측에 따르면 고구려는 중국의 ‘중앙정부’에 줄곧 조공을 바치러 온 지방정부였다는데.

“중국의 독특한 역사서술 방식이다. 외교관계로 온 타국의 사신도 모두 조공하러 온 것이라고 기록하는 식이다. 그렇게 따지면 『삼국사기』에 진대덕이란 당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것이 기록돼 있는데 그도 고구려에 조공하러 온 셈이다. 몇몇 학자들은 여기에 대고 ‘당시 조공을 하긴 했지만 당시 동아시아 관계 때문’이라고 변명하는데, ‘조공’에 관련된 부분은 중국의 독특한 역사서술 방식일 뿐이다. 중국인들이 주장한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중국은 또한 고구려가 망했을 때 인구 중 상당수가 중국에 동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인들도 이 같은 동화정책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지배층들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 그런데도 옛 고구려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니까 그곳의 고구려인들을 집단으로 중국의 남부로 이주시켰다. 그렇게 저항의욕을 막았는데도 만주에 남아있던 고구려인들은 발해를 세우지 않았는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인들이 대부분 중국화됐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중국측은 수-고구려 침략을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즉, 수나라와 당나라인들이 고구려를 자신들과 하나의 민족으로 봤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사서 등의 기록은 어떠한가.

“억지가 심하면 대꾸할 게 없다. 수나라는 당시 양자강 이남에 있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다음 통일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를 다른 민족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가능한 서술이다. 그런데 수나라 건국 직후 고구려의 영양왕이 수나라를 공격하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가 자신들과 하나의 민족이라고는) 고구려를 침략한 수나라 문제도, 양제도, 당나라 태종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말리는 신하들에게 당 태종은 ‘수나라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러 가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 태종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만든 주역인데, 그의 입에서 고-수전쟁(고구려-수나라 전쟁)에서 죽어간 수나라 자제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소리가 나온 것은 분명 고구려를 다른 민족으로 봤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의 지방정권이면 통일하러 간다고 하지, 원수 갚으러 간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자기 역사를 멸시하는 나라는 없다”

- 중국은 “고려가 계승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삼한”이라며 한국사에서 고구려사의 분리를 꾀하고 있다. 삼한은 한강 이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으며 고구려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최치원은 『삼국유사』에서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다’라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는 AD 1~3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설립되어 있었음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한국 사학계는 ‘최치원이 틀렸다’며 마한의 영역을 고구려와 분리해 전라도 일대로 한정했다. AD 1~3세기의 삼국의 존재도 지우고, 요즘으로 치면 면단위 소국들의 집합체라는 삼한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AD 3, 4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대국가가 설립됐다고 주장한다.”

- 선생님은 삼국시대가 AD 1~3세기에 이미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 성립시기는 AD 3세기 이후가 아니라 AD 1세기 이후란 말인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대로 보면 된다. 풍납토성을 보라. 이 유적은 이미 1세기 때 국가(백제)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학계는 그동안 백제가 3세기 후반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역사와 유물이 앞뒤가 안 맞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한국 사학계 주장의 근거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전부라는 것이다. 더욱이 관련 기록의 길이도 2~3장 정도로 아주 짧다. 결국 한국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방대한 기록을 모두 버리고 『후한서』 등 중국 사서를 취한 것인데,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역사 해석 방법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자기네 나라 사람이 쓴 자기네 역사서를 무시하고 다른 나라의,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 뭐가 있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에 의존해 만든 역사서로 자국의 역사를 해석한단 말인가.”

- 이덕일씨는 이렇게 역사가 후대 사학자들의 칼과 자에 의해 재단되다 보니 종종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한다며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원(原)삼국시대’ 전시장이 있다. 1~3세기까지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것이다. 왜 ‘원삼국시대’냐고? 한국 사학계는 이 시대가 삼국시대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온 삼국시대의 유물이 계속 출토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원삼국’이란 엉뚱한 호칭을 갖다 붙일 수밖엡. 이토록 철저하게 자국 역사를 부정하고 비하하는 사관을 갖고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 한국밖에 없다. 이뿐인가. 중국 정사에도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럴리가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중국의 정사가 어떤 것인가. 춘추필법이라는 형식에 따라 자기네 것은 유리하게 쓰고 남에게 이로운 것은 안 쓰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기준에서 한 글자만 어긋나도 사형을 면하기 힘들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중국의 정사다. 그런 정사에 백제가 요서지역을 점령했다는 문구가 나왔는데도 믿지 않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역사 해석 방법이다.”

중국측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스스로 삼한을 계승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고려는 별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한이 고구려라면, 중국측의 주장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되겠다.

“한국 사학계가 마한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 있었어도 이래저래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매우 당연한 사실이다. 흔히 고조선에서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전라도 일대에서 마한의 왕이 됐다고 설명하는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도망가는 모습을 사서는 ‘주입해(走入海)’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다로 들어갔다는 뜻인데 이는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 수도가 (한국 사학계가 주장하듯) 평양이 아니라 만주였다는 증거다. 만약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면 준왕은 굳이 해로를 선택해 도망칠 필요가 없게 된다. 해로를 택했다는 것은 산세가 험해서 빨리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요동반도가 그렇다.
요동반도에서 평양으로 이동하기에 해로가 적합했던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마한이 고구려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즉, 왕건이 스스로 삼한을 계승했다고 했을 때 마한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왕건이 삼한을 계승하겠다고 하고 국호를 고려라고 했겠는가.”

우리 대륙사의 큰 줄기를 지킨 고구려

- 한국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 민족사는 크게 대륙사와 해양사의 체계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반도사에만 갇혀서 해석을 해왔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어 대륙사의 큰 줄기를 지켜낸 고대국가다.”

중국인들은 ‘현재 중국 영토 내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고 주장한다, 이는 곧 현재 중국 영토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들은 모두 ‘중화민족’이란 말도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예컨대 중국 동북지역에 살았던 거란, 여진, 몽고, 말갈 등 북방민족들은 언어, 문화, 관습 등에서 한족(漢族)보다 우리 민족에 더 가까웠던 것 아닌가. 이들이 세운 요, 금, 원 등을 중국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닐까. 혹시 한국 사학계는 이런 연구는 하지 않는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과거 거란, 여진, 말갈 등이 고구려 등을 부모의 나라로 모신 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럴 텐데 사실 그쪽에 대해서는 연구가 안 돼 있다. 중국사를 공부한다면 대부분 명사와 청사에 집중 할 뿐이다. 북방민족들은 우리 민족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단일 혈통을 주장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성계가 거느렸던 부대가 강했던 이유는 몽고, 여진족들로 꾸려진 기병 위주의 혼성부대였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 민족의 개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서양의 경우 봉건제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에 국가와 민족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동양에서의 민족 개념은 같은 영역에서 비슷한 언어, 비슷한 문화,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활동한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동양인들은 서양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국가와 민족을 형성했고 이 테두리 안에서 살아왔다고 본다.”이 같은 이덕일씨의 민족개념은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그램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중국측의 역사관은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역사와 민족은 중국사이며 중화민족’이란 철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 문화, 생활양식 등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는 기실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좌파 사관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중화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살짝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 사학계와 한국 정부의 대응을 어떻게 보는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학문은 정치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현지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발언을 못하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 학자들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질책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이 문제가 불거지니까 어떤 사학자들은 재야 사학자들이 과격한 주장으로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중국이 이렇게 나오는 거라며 비난하고 있다. 중국이 어떤 나라인데 그런 일에 국가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프로젝트를 수행하겠는가.

국가 차원에서의 대응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 중국이 실컷 정부 차원에서 지원 다 해 놓고, 한국엔 ‘정부는 빠지고 민간에 맡기자’고 하니 한국 외교부가 덩달아 ‘정부가 해결할 부분이 아니라’고 했다.일본 역사왜곡의 경우 출판사 하나가 만든 교과서를 두고도 말이 많았는데,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별다른 말을 못한다.”

송의 충신 악비가 반통일분자?

- 최근 서양사학자 중에 국사를 해체하고 민족의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 중국이나 일본 등의 역사 왜곡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국가라는 거대 조직이 인간이나 개인을 억압하는 체제로서 이용되는 것은 반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독재정권이 부활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사가 국가 단위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국사를 해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민족주의만 해도 해외 강대국들에겐 억압의 논리였지만, 우리에겐 저항의 논리였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까지 모두 도외시하고, 국사 해체를 일반 국가로 모두 확대해 버리면 국사 해체가 아니라 역사 해체로 갈 수밖에 없다.”

이덕일씨는 인터뷰 말미에 송나라의 악비 장군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금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끝까지 싸우다 배신자의 모략에 걸려 최후를 맞이한 악비는 중국에서는 이민족에 맞서 싸운 충절의 상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사당을 지어 모셨다.

악비 상 옆에 세워진 배신자 진회의 상에는 사람들이 하도 침을 많이 뱉어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을 내걸 정도였단다. 하지만 금나라를 중국사로 편입하면서 악비의 위상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이 논리에 따르자면 금은 송에 대해 통일전쟁을 추진한 것이고, 악비는 ‘반통일분자’가 된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일반 중국인 사이에서도 반발이 거세다면서, 이덕일씨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마무리지었다.

“현실 권력으로 과거의 역사를 지배하려고 하는 시도는 부분적으로 성공할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디지털말 / 이종태 기자 200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