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의 병리현상 ‘극단주의’

중 축구팬 반한뿌리 뒤틀린 ‘오리엔탈리즘’

중국 산둥성 지난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컵 축구대회에서 중국 축구팬의 ‘반일감정’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일본말고도 한국팀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다. 동아시아의 축구 강국에 대한 질시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배후엔 중국인의 ‘아시아를 멸시하는 태도’(이른바 오리엔탈리즘)가 깔려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축구장의 함성 아래서 현대 중국의 또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편집자

아시아컵 예선 B조에 속한 한국팀은 지난 27일 밤 쿠웨이트를 4 대 0으로 크게 이기면서 8강에 올랐다. 중국이 주최국인 까닭에 중국중앙텔레비전의 스포츠 채널(시시티브이-4)은 대부분의 경기를 실황중계했다. 한국 대 쿠웨이트 경기의 중계를 맡은 아나운서 류젠훙은 이날 이례적으로 한국팀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발언이 ‘이례적’인 까닭은 류젠훙이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축구를 근거없이 폄하하면서 중국 전역에 ‘한국 때리기’(다오한) 열풍을 몰고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23일 한국 대 아랍에미리트의 경기 중계를 맡았을 때도 빈정거리는 말투로 “한국팀은 병든 호랑이”라든가 “운이 좋아서 한 골 넣었다”는 식의 상식 밖의 발언을 일삼았다(〈한겨레〉 7월24일치 보도). 주중 한국대사관은 이 보도가 나간 뒤 26일 중국 외교부에 공문을 발송해 “이번 대회에서 혹시 벌어질 수도 있는 한국 대 중국의 축구 경기를 중계할 때 방송에서 한·중 두 나라 국민의 우호를 해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해주길” 정식으로 요청했다. 중국 축구의 ‘공한증’과 이에 대한 반발감에서 비롯한 ‘다오한’ 감정은 한창 밀월기를 구가하고 있는 두 나라 외교가의 심각한 ‘복병’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지난 31일 한국이 이란에 패하는 바람에 중국과 조우할 기회를 잃었지만, 한-중전은 그 만큼 한·중 외교가를 긴장시킬 예민한 사안이었다.

한국 쪽의 이런 반발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류젠훙은 한국과 쿠웨이트 경기에서 특유의 ‘문제 발언’을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경기가 끝난 뒤 류는 “오늘 내가 이렇게 한국팀을 두둔하면 중국 축구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마치 중국 축구팬의 반한감정이 극심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다오한을 선동했다는 변명으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류는 중국 네티즌으로부터도 ‘다오한을 부추긴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89년 천안문 참극 급진적 서방찬양론 낳아
“전통 90%가 찌꺼기” 자국멸시 아시아로 확대
유럽 이긴 한국축구에 병적인 증오 보이게돼
또다른 극단 중화주의도 양국관계 ‘복병’으로

화산젠이란 필명을 쓰는 네티즌은 류젠훙, 황젠상, 장빈 등 시시티브이의 축구중계 아나운서 비판의 선봉장이다. 그는 19일 인터넷 사이트 문화산론( http://club.cat898.com)에 발표한 ‘그리스의 우승과 세 명의 시시티브이 성난 청년’이란 글을 통해 류젠훙 등 세 아나운서가 “중국 축구를 만나면 반드시 극력 깎아내리고, 서방 축구를 만나면 반드시 무릎꿇고 숭배하는 언행을 일삼는” ‘축구계의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그가 보기에 이들이 2002년 한국 축구 때리기에 앞장선 것도 ‘유럽중심주의’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유럽은 세계 축구의 성지”라고 ‘전도’해온 이들은 중국 축구계를 승부 조작과 도박, 뇌물 수수 등으로 얼룩진 구제불능의 부패집단으로 묘사해왔다. 94년 출범한 중국 프로 축구계에 그런 병폐가 있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배후에 “중국(나아가 동방)을 멸시하고 서방을 찬양하는” ‘폄중양서’의 가치관이 박혀 있기 때문에, 유럽리그 선수들의 등 번호판을 줄줄 꿰고 있는 ‘추미’(중국의 열성 축구팬)들로 하여금 정작 중국축구에 대해서는 극도의 혐오감을 갖도록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 세 명의 ‘성난 청년’이 숭배하는 유럽축구의 강호들이 2002년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무명팀에 줄줄이 무너지자, 이들은 “한국선수들이 흥분제를 먹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거나, “심판의 도움에 기대어 부끄러운 승리를 얻었다”(류젠훙)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소인배가 뜻을 얻었다”(황젠상)고 노골적인 야유를 서슴치 않았다.

그는 중국(동방)을 멸시하고 서방을 찬양하는 이런 가치관의 뿌리를 1980년대 중후반 급진 문인들의 ‘문화반성운동’에서 찾는다. 이들은 “중국 전통의 90%가 찌꺼기”라고 외치며 급격한 서방화를 추구했다. 이 급진적 ‘양무운동’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오늘 축구를 통해 “중국 멸시와 서방 찬양”의 왜곡된 정서를 대중에 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 내부의 오리엔탈리즘인 셈이다.

1989년 6월4일 천안문의 참극으로 종말을 고한 80년대 말의 급진적 서방찬양론은 문화대혁명(1966~1976)이라는 극단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또 다른 극단이다. 양무운동과 서방찬양에 내포된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건 정당하지만, 그 비판 논리엔 대개 ‘중화주의’라는 또 다른 극단이 숨어 있다. 중국 축구계의 ‘성난 청년들’을 비판하는 화산젠의 글에서 중화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좋은 예이다. 오로지 극단에 대한 경계만이 양무운동과 중화주의의 악순환을 끊고 동아시아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겨레신문 / 이상수 베이징특파원 200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