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왜곡 '東北工程'의 실체

 

‘고구려=중국’ 기정사실화 노린 3조짜리 프로젝트

 

개혁 개방으로 동북지역 전략적 가치 높아지자 국가적 관심 기울여

‘고구려 민족은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발족한 소수민족으로 전반적인 발전 역사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으며, 이는 중화민족의 역사문화 구성에 빛나는 한몫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지난 10월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중국 학자의 논문 첫 문장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중화민족의 역사문화’라고 주장한 것은 중국의 고구려사관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로, 79년 북한이 ‘조선전사’를 발행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북한이 주체사상 확립을 위해 ‘조선전사’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특별히 강조한 데 대한 중국측의 반발이었다.

주로 중국의 동북 지방(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 역사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연구는 1980, 90년대를 거치면서 1,000편이 넘는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대외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방국인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국가정책 때문이었다.

북한의 ‘고구려사 강조’에 반발한 중국

그러던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라 큰 이슈로 등장한 것은 2001년 북한이 고구려 벽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면서부터였다. 1998년 10월 세계유산협약 가입국이 된 북한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와 문화자산보존 및 복원연구국제센터(ICCROM)의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받아 유적을 정비한 뒤 2001년 등재 신청했다.

만약 북한의 벽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고구려=중국사’라고 주장해온 중국으로서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고구려 문화가 한국의 것이라는 사실이 온 세계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급히 문화부 차관을 북한에 보내 고구려 유적을 공동으로 등재하자고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때부터 고구려 문제는 중국의 중요한 국가적 정책과제가 되었다. 그 구체적 예가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나라의 통일과 변방지역의 안정’에 대한 정치의식 등 다섯 가지 원칙에 따라 수행되고 있다. 이 사업에는 5년간 약 200억위안(약 3조원)이 투입될 예정이라고 한다.(중앙일보 2003년 7월15일자)

이 연구소는 지난해 7월9일부터 13일까지 관련 학자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고구려 전반에 대한 특별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에서는 논문 70여 편이 발표되었으며, 올해도 지난 10월9일부터 3일간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길림성 집안시에서 3차 고구려학술대회를 가졌다.

이 학술대회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고구려의 기원 및 정체성과 관련한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고구려=중국 변방의 민족정권’이라는 전제 아래 이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것인지 논의를 거듭했다. 프로젝트의 계획서는 ‘중국의 동북지역이 근대 이후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특히 개혁 개방 이후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역사 연구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중국측 주장은 아래와 같이 크게 6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

고구려가 탄생한 지역은 기원전 3세기 모두 연(燕)의 영역이었고, 진(秦)이 6국을 통일한 뒤는 진나라의 요동외요(遼東外邀)에 속했다.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衛滿)조선을 멸망시키고 현토군을 설치했는데, 이 때 고구려는 현토군의 한 현이었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고구려 5부를 통일하고 나라를 세운 곳도 한나라 현토군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건국은 이처럼 모두 중국 영토에서 진행됐으므로 오늘의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2. 고구려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주몽의 건국 이전 고구려현은 이미 한조(漢朝)의 현토군에 속했다. 동한(東漢) 180년 동안 고구려는 모두 동한 왕조의 신하였다. 220년부터 426년까지 고구려는 중국 중앙정권의 신하로 예속돼 고구려후·고구려왕·정동대장군·영주사사(營州刺史)·낙랑군공(樂浪郡公)·낙안군공(樂安郡公) 같은 관직을 받았다.

남북조 시기에는 북위·북제 및 남조의 각 정권에 공물을 바쳤다. 또 북위·북제 및 남조 역대에서 내린 고구려왕·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정동장군(征東將軍)·요동군공(遼海郡公)·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산기상시(散騎常侍)·동이교위(東夷校尉)·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같은 관직과 직무를 받았다.

고구려가 수·당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지만, 그 기간은 모두 합해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70년 남짓한 기간에는 수·당에 신하로서 예속돼(臣屬) 수·당이 내린 관직을 받았다. 이처럼 고구려 왕국은 시종 중국의 한 지방민족정권이었다. 일시적인 할거를 이유로 전 역사 기간 중국에 귀속됐던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3. 고구려 민족은 중국 고대의 한 민족이다.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의 후예들 가운데 일부는 중원·돌궐·발해 등으로 들어가 모두 중국의 각 종족에 융화되었다.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들만 신라로 넘어갔다. 오늘날 한민족의 선조는 주로 고대 삼한(三韓), 즉 신라인이고 조선반도로 옮겨간 중국의 각 종족도 상당수 섞여 있다. 고구려의 후예는 극소수다.

4.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국내전쟁이었다.

오늘날의 한·중 국경을 놓고 본다면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침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고구려 이전 1,000년간 (낙랑군 400년 + 기씨조선·위씨조선) 중국 한족이 지배하던 곳이기 때문에 수·당이 고구려를 친 것은 침략전쟁 아니라 중국 국내민족 간의 전쟁이다. 고조선 - 위씨조선 - 낙랑으로 바뀐 것도 모두 한족이기 때문에 같은 국내민족 내부의 통일전쟁이며, 고구려가 낙랑군을 차지한 것도 중국 내에서 전개된 다른 민족 간의 침범이다.

5.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다. 고려는 왕씨

왕 건(王建)은 신라 장군이었고,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를 건립했다. 왕 건은 신라 김씨 계통으로 고구려 고씨의 위(位)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왕씨 고려는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고 수도 개성은 신라의 옛 땅이지 고구려의 땅이 아니다. 왕씨 고려는 신라인과 백제인, 일부 고구려인, 한인(漢人) 후예들이 세운 것이지 고구려의 후손이 세우지 않았다. 왕씨 고려는 한국 역사, 즉 오늘날의 한민족 선조가 건립한 것이지만, 고구려(고씨 고려)는 중국 역사로서 오늘날 중국 각 민족의 선조가 세운 것이다.

6. 한반도 북부 북한 지역도 중국의 역사다.

한반도도 오늘날 한민족의 거주지가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5세기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놓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 된다.

15세기 이후의 이씨조선과 기씨(箕氏)조선(기원전 11세기), 위씨(衛氏)조선(기원 2세기) 등은 모두 조선이라고 불렀으나 민족 구성과 국가 귀속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씨조선은 오늘날 한민족이 세운 조선으로 한국의 역사에 속하고,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한족(漢族)을 선조로 한 옛 조선으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이전 고구려는 중국역사이고, 평양 천도 후는 한국사라는 설도 틀린다. 고구려가 두 나라로 나뉘어 속할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놓고 나누는 것일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당시 국경을 감안하면 5세기 전후 고구려는 모두 중국 영토에 있었던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당(唐)은 신라에 대동강 이남 지역을 떼어 주었고, 요(遼)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 영토를 고려에 떼어 주었고, 명(明)은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 주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한·중 국경은 한민족이 북쪽으로 확장해 형성된 것이다.

우리 고대사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태 막아야

중국의 이런 역사왜곡을 처음 들은 한국인은 분노하고 어처구니없어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수백 명이 연구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부작용만 낳을 수 있다.

우리도 중국에 못지않은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우리의 논리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전담하는 연구소를 설치하고 충분한 자금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이 방면을 연구할 젊은 학자를 정책적으로 배출해야 한다. 지금처럼 역사 전공을 기피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빈곤한 논리 때문에 우리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비극이 올지도 모른다.

역사란 단순히 옛것을 배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국가의 현실과 미래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임을 이번 기회에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바로 요나라(거란)의 소손녕과 고려의 서 희(徐熙)가 벌인 역사 담판이다. 그 역사 담판의 주제도 바로 고구려의 정체성 문제였다.

소손녕은 “당신네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가 차지했는데, 당신네가 이를 조금씩 먹어들어 왔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고려로 쳐들어온 거란의 논리였다. 이에 서 희는 “그렇지 않소.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오. 그렇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소. 만약 국경을 따진다면 귀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국경 안에 있던 것인데, 어찌 조금씩 먹어들었다고 할 수 있소”라고 당당하게 반박해 결국 우리 군사를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고 적을 물러나게 하였다.

사실 거란은 과거 고구려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고려와 고구려의 정체성을 가지고 논의할 자격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북경 남쪽을 차지했던 중국의 송나라가 고구려에 대한 연고권을 한 마디라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도 곰곰이 짚어 봐야 한다. 지금 한·중 간의 고구려 역사전쟁도 고려시대와 같은 상황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당장 행동에 들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내년 6월 중국 소주(蘇州)에서 열리는 제27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한·중 두 나라가 신청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질 예정이다. 이 회의에서는 먼저 신청한 북한의 고구려 유적이 등재되거나, 완벽한 준비를 한 중국의 유적이 등재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두 나라 유적이 한꺼번에 등재되는 세 가지 중 하나의 결과가 예상된다.

우선 북한의 유적만 등재되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거의 완벽하게 등재될 것처럼 보이던 북한 유적이 중국의 로비로 밀려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분위기는 북한과 중국의 신청이 별도로 심사될 경우 중국이 더 유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에서 문화유산위원회가 열리는 데다 유적 규모나 정비 상태도 북한보다 나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두 나라 유적이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우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현재 유네스코에는 한국의 7건 등 전 세계적으로 754건이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이 가운데 같은 유적을 2개국이 동시에 등재한 경우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지역에 위치한 가톨릭 순교루트 1건밖에 없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관계자는 “한국·북한·일본 등의 반발 등을 고려할 때 공동 등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중국은 ‘고구려 문화는 한국의 문화’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해 북한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막았다. 중국의 고구려 유적만 등록되면 세계는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인식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북한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의 역사가 어느 나라에 속하느냐 하는 실로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인식해 적극 대처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온 국민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원국들에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서길수 서경대 경제학과 교수·고구려연구회장>

(월간중앙 200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