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전역 덩샤오핑 추모열기

탄생 100주년 앞두고 재조명

중국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로 불렸던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이 다시 부활했다는 말이 과하지 않을만큼 뜨거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오는 8월 22일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간과된 인간적 매력과 업적이 재조명받는 등 거의 전 대륙이 들썩일 정도로 국민적 추모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997년 2월에 사망, 역사가 된지 이미 7년이 훌쩍 넘은 그를 기리는 열기는 아무래도 고향에서 가장 먼저 확인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 파이팡(牌坊)촌 생가에 전국 각지의 추모 인파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방문 행렬을 연일 이어가고 있다. 올해에만 벌써 500만명이나 찾았다고 런민르바오(人民日報)를 비롯한 중국 언론이 전하고 있다.

그동안 자제됐던 동상을 비롯한 각종 기념 조형물 설립 붐도 활기를 띠고 있다. 고향인 파이팡촌에 높이 10m가 넘는 상반신 대형 기념물이 설립된데 이어 광둥(廣東)성 선전(深玔), 쓰촨성 청두(成都), 베이징 중화스지탄(中華世紀壇)등에 흉상과 조형물들이 잇따라 세워졌다.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웬만한 대도시들에도 조만간 그를 기리는 흉상이나 조형물들이 세워질 예정으로 있다. 기념 우표 발행이나 토론회, 시서화 전시회, 추모집의 발행 등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영화의 경우도 ‘샤오핑 니하오’, ‘프랑스 시절’, ‘덩샤오핑 1928’등 3편이 제작돼 8월부터 전국적으로 방영될 예정으로 있다.

이런 중에도 주목되는 사실은 그의 긍정적인 인간적 면모가 유독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다. 방송과 신문 등에 연일 보도되는 측근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우선 너무나 검소했던 것으로 추억되고 있다. 부인 줘린(卓琳)을 비롯한 유족들이 그의 장례후 유품을 정리하다 곳곳에 빈틈없이 구멍난 옷을 보고 울었다는 일화는 이제 유명세를 톡톡히 탈 정도로 회자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문화혁명 직후 최고 지도자에 올라선 이후에도 항상 일반 민중들과 함께하려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사망때까지 최고 지도자들의 숙소인 중난하이(中南海)를 마다한 채 징산(景山)공원 앞의 일반 가옥에 살았던 그가 외출시 경호차량 수행과 교통 통제를 몹시 싫어했다고 회고한 ‘영원한 샤오핑(永遠的小平)’이라는 쓰촨런민출판사 발행의 일대기가 잘 말해준다.

이처럼 덩이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화려하게 부활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예측하지 못했던 현재 중국의 번영이 분명히 그의 지도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건국의 아버지는 마오쩌둥(毛澤東)이지만 중국인을 잘 살게 만든 실질적 국부는 덩이라는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해도 좋다. 여기에 검소하고 민중을 먼저 생각했던 최고 지도자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킴으로써 점점 약해지는 국민들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의중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실제 지금 중국은 빈부 격차의 심화로 사회주의의 최대 장점인 일사불란한 사회 통합이 요원한 상황으로 치닫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어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현재의 분위기로 볼때 탄생 100주년인 8월 22일 이후에도 덩에 대한 추모 열기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 호사가들이 올해 중국을 통치하는 지도자가 후진타오(胡錦濤)국가주석겸 총서기가 아니라 덩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서슴없이 하는 것은 그래서 별로 과하게 들리지 않는다.

(문화일보 / 홍순도 베이징특파원 2004-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