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지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이집트 하면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 왕국에는 클레오파트라 외에도 여섯명의 여왕이 파라오(절대군주)로서 이집트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중 누구보다 걸출했던 파라오의 한사람으로 핫셉슈트 여왕(BC 1503~1482년 재위)을 꼽는다. 핫셉슈트 여왕은 원래 투트모세 2세의 왕비였으나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하자 첩 소생의 아들인 투트모세 3세를 대신해 20여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다.

통치기간 중 이집트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부강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집트 관광명소의 하나로 유명한 룩소르에 있는 3층 구조의 핫셉슈트 신전은 아직도 그 웅장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근래엔 이 신전 앞에서 세계적인 가수들을 초청, 이집트를 소재로 한 초대형 오페라 '아이다'를 공연해 더욱 유명해졌다. 신전 1층 좌측 벽화에는 룩소르 카르낙 신전의 오벨리스크에 사용된 화강암을 해외로부터 7개월에 걸쳐 운송해 오는 장면이 묘사돼 있고, 우측 벽화엔 여왕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과 왕들의 조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핫셉슈트 여왕 때문에 20여년간 억압된 생활을 강요받은 투트모세 3세는 여왕 사후 즉위하자마자 신전과 오벨리스크에 묘사된 핫셉슈트 여왕에 대한 기록을 지우도록 명령해 신전의 많은 부분이 파손됐다. 그러나 핫셉슈트 여왕에 관한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근세에 들어 상형문자 해독과 더불어 핫셉슈트 여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최근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에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신라.고구려.백제 3국 중 고구려를 느닷없이 삭제해 버렸다. 동북아 중심으로 발돋움하려는 우리에게 중국의 변방으로 남아 있으라는 중국의 속내를 보여준 게 아닌가 해 떨떠름하다. 실제로 중국 국무원 소속의 신화통신과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7월 초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동시에 게재한 바 있다. 이에 앞서 '동북공정'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의 사회과학원은 2003년 10월 자체 발간한 학술서적을 통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한 내용을 교과서와 사전 등에 반영할 것을 건의했으며, 이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는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입장을 2004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논문을 통해 주장한 바 있다.

최근 중국 내 고구려 유물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고구려문화관광축제'를 중국 지안(集安)에서 2004년 7월 20일부터 10월 15일까지 열고 있다. 이러한 축제 등을 통해 새로운 역사관에 대한 대내외 선전과 교육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다.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을 볼 때 중국이 조선족 사회의 동요를 미리 차단하고, 멀리는 남북한 통일 과정 및 이후를 염두에 둔 정치적 책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이집트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역사는 지우개로 지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왜곡된 역사 속에서 선린우호는 뿌리내릴 수 없다.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 주변국과의 정세 안정을 바라고 있을 텐데 고구려사 편입 시도는 이러한 중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도 반할 것으로 생각된다. 민족적 자긍심을 바탕으로 이웃 간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바꿔보려는 기도는 성공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중국 역사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그 진실성을 의심받게 될 것이다.

이제 한.중 양국은 훼손되거나 사라져가는 북한 및 중국 동북지역의 각종 유물과 유적을 있는 그대로 잘 보존.관리해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인류 문화유산을 전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오윤경 / 외교통상부 대사 / 전 이집트 주재 대사>

(중앙일보 2004-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