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중국]1. 민궁(民工)의 비가

지난 5월 초 전세계는 원자재값 폭등으로 야기된 ‘차이나 쇼크’를 경험했다. 뉴욕 타임스는 ‘중국을 위한 기도문’이라는 이색 칼럼에서 “중국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라며 “세계는 중국의 어떤 불안정도 받아들이기가 점점 어려워지게 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급성장만큼 불안도 커지고 있다는 우려다. 경향신문은 성공신화의 화려함에 가려진 또 하나의 중국에 눈길을 돌렸다. 베이징 쯔진청(紫禁城)은 본디 남쪽에 정문인 톈안먼(天安門)을 두고 북쪽에 후문인 디안먼(地安門)을 배치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거리 이름만 남은 디안먼은 그저 보통사람들의 땀냄새가 풍기는 삶의 공간일 뿐이다. 텐안먼이 중국의 ‘빛’을 상징한다면, 디안먼은 중국의 ‘그림자’를 상징한다. 한국도 그 그림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기획시리즈 ‘地安門-또 하나의 중국’을 통해 디안먼 너머 13억 중국의 이면을 파헤쳐 본다.

“우린 80년대부터 또 한 세기를 넘어 떠돌고 있네/ 이 도시는 날마다 발전해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네/ 하지만 내 불빛은 하나도 없네/ 형제들이여, 우리의 불빛은 하나도 없네.”

중국 경제발전을 떠받치는 기둥이면서도 ‘21세기판 노예’의 삶을 사는 민궁(民工)들의 민요다. 민궁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임시거주하며 3D업종에서 일하는 도시빈민이자 산업예비군을 가리킨다. 건설노동자, 봉제공장 여공, 파출부, 우유배달부, 식료품 판매원, 서비스업 종업원 등 도시를 움직이게 하는 고되고 힘든 일을 도맡는다. 일부는 임시거주허가증(暫住證)이 있지만 상당수는 불법체류자다. 중국은 호구(戶口·주민등록)를 농촌과 도시로 구분해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도 베이징의 호구를 가진 주민들은 잘사는 상하이 주민조차 ‘외지인(外地人)’이라며 얕볼 정도다. 하물며 농촌에서 올라온 민궁들에 대한 시각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러 집에 들어가서 도둑질하지 말라…. 아무데나 대소변을 보지 말라…. 포르노 영상물과 음란 인쇄물을 보지 말라….”

‘민궁의 3대 기율과 8개 주의사항’이란 노래의 한 구절이다. 베이징에서 초등학생들도 흥얼거릴 만큼 유명한 노래다.

중국 정보기술(IT)산업의 메카 중관춘(中關村)이 자리한 베이징 하이뎬(海淀)구는 여기저기서 ‘공사중’이다.

이곳 건설공사판의 민궁들은 매일 새벽 5시30분(겨울엔 새벽 6시) 현장에서 일과를 시작한다. 이들에겐 일요일도 없다. 1년중 설(春節)연휴 2주를 쉴 뿐이다. 혹여 관리자가 쉬라고 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일자리를 잃을 걱정 때문이다. 오전 11시30분 배추를 식용유에 버무려 끓인 바이차이탕(白菜湯)을 밥에 얹어 먹는 것으로 점심을 때운다. 이런 세끼 식비는 매일 6위안(900원)씩 월급에서 공제된다.

밤 10시 일을 마친 민궁들은 핑팡(平房)이라고 불리는 벌집 기숙사로 향한다. 기숙사 안은 악취가 진동했다. 바닥은 흙벽돌이 울퉁불퉁하고, 8명이 같이 쓰는 4평 정도의 방안엔 판자를 엮어 짠 2층침대 4개가 놓여 있다. 선풍기 하나 없어 모두 팬티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천장에 달린 30와트 백열등은 기숙사 전압이 낮아 밤 11시가 넘어야 켜졌다. 그나마 주거환경은 1년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중고 TV와 세탁기는 1년 전엔 못보던 것이었다.

“너무 피곤하다. 뼈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 같다. 힘들 땐 고향에 있는 처자식을 생각한다. 그러면 곧 행복해진다.” 민궁 멍씨(孟·27)가 외국 기자에 대한 경계를 풀며 말문을 열었다.

가슴에 ‘구냥(姑娘·아가씨)’이라고 큼직한 문신을 새긴 이는 “이젠 궈녠첸(過年前)에 울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올들어 건설 민궁들의 처우가 나아졌다는 것이다. ‘궈녠첸’은 업주들이 민궁들의 월급을 1년 동안 체불한 뒤 음력설 때 몰아서 주는 악습이다. 뿐만 아니라 업주들은 온갖 숙식비 명목을 만들어 민궁들의 쥐꼬리 월급에서 악착같이 공제한다. ‘벼룩의 간 빼먹듯’ 하는 공제수법을 가리켜 ‘날아가는 기러기의 털도 뽑는다(雁過拔毛)’고 민궁들은 말한다.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올해 초부터 악덕업주들에 대한 단속을 대폭 강화하면서 민궁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민궁들은 후 주석을 ‘후 형님’이란 뜻의 애칭인 ‘후거(胡哥)’로 부른다. “올해 들어 경찰이 불법체류자 단속을 하지 않아 다행이다.” 8명 가운데 좌장격인 40대 남자가 거들었다. 그는 2년 전 베이징에서 불법체류 중 불심검문에 걸리는 바람에 베이징 외곽으로 끌려가 한달간 삽으로 땅만 파는 강제노역을 했다. 이같은 강제노역은 범법자들의 사상개조를 위해 행해지곤 했다. 노역을 마친 뒤 고향으로 추방됐던 그는 다시 베이징행 기차를 탔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수염이 텁수룩한 민궁은 “월급이 지난해보다 200위안 올랐다”며 내년 설 때는 7,000위안을 모아 고향에 돌아가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건설현장의 민궁 월급은 1,200위안(18만원). 민궁은 중국 전역에 1억명이 넘는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당장이라도 농민 1억3천만여명이 민궁의 행렬에 뛰어들 것이라고 한다.

(경향신문 / 베이징 김인수기자 2004-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