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화패권주의 망령서 깨어나라

최근 탈미친중(脫美親中)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한국인의 의식 속에 가깝게 다가오던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돌연 고구려사의 자국사로의 편입이라는 무리수를 두었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의 이와 같은 행동은 교역대상국 1위라는 지위와, 북핵 해결과정에서의 긍정적 영향력 등으로 인해 한국에서 불고 있는 '중국으로'라는 구호를 무색하게 하였고 한국인에게 민족적 공분을 일으키며 중화패권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중국은 1997년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 때 위안화 절상에 대한 서구의 압력을 견뎌내며 아시아 지도국가로서의 지위에 성큼 다가갔다. 중국의 이러한 대국적 행보는 미국패권주의에 대한 반감이 확산돼 가던 상황에서 "아시아 지역 내 적절한 견제력을 가진 중국의 부상이 꼭 나쁘지마는 않은 현상"이라는 감정을 아시아, 특히 한국에 확산시켰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이미지는 최근 고구려사에 대한 논쟁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진 위험한 이웃으로 각인되고 있다. 중국의 동북아시아 패권국가를 향한 일련의 행보에 불안을 느끼는 한국민들이 늘어나는 것은 동북아시아에 불고 있는 협력과 화해 분위기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많은 한국인은 미국이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적어도 영토적 야심은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최근 행보와 고구려사에 대한 막무가내식 왜곡행위는 '중국이 영토적 야심을 가진 지역패권국가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확산시킨다.

아시아의 맹주자리를 노리는 중국은 '헤게모니는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도덕적 동의에 의해 생성.유지된다'는 그람시의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주변국의 자발적.도덕적 동의가 전제되지 않은 헤게모니의 추구는 아시아인 간의 반목과 질시를 낳아 아시아인의 에너지를 소모적인 논쟁으로 분해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최근 동북아에는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동북아경제협력체 및 안보협력체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동북아 국가들의 잠재력을 결합해 내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동북아의 지도적인 국가를 추구하는 중국에 의해 야기된 한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아직도 20세기 전반부 역사가 주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부채를 털어버리지 못한 동북아 주요 3국으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논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는 19세기 서구의 침탈 속에서 무기력하게 당한 치욕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중국이, 동북아 부흥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미국이 가지는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중국이 대체하고 있는 추세는 부인할 수 없다. 아시아의 미래는 이러한 흐름을 중국의 주변국만이 아닌, 중국 스스로도 선순환할 수 있도록 어떤 방식으로 협력의 구도를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술적 실수가, 한국이 미국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의 회귀라는 단순한 '반발적 회귀전략'으로 나타나서도 안 된다. 한국은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왜곡 및 자국사로의 편입 시도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냉전종식 후 동북아시아의 전략 균형추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때문에 중국이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함께 한국의 자주적 국익을 신장하는 구조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고구려 정체성에 관한 중국의 섣부른 도전에 대해 객관적 자료와 치밀한 논리로 이른 시일 내에 중국의 논리를 제압함으로써 중국의 사과와 함께 소모적인 고구려사 논쟁을 조기에 종식시켜야 한다. 이것이 이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동북아 국가 간 협력의 중요한 고리인 한.중관계의 후퇴를 막는 것이며, 미래의 이웃인 중국이 더 깊은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상처를 입기 전에 그들을 깨우치고 보듬어야 할 우리의 책무인 것이다.

중국 또한 동북아시아의 지도국가로 자리잡기를 원한다면 시대착오적인 중화패권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역사에서 패권국가와 제국주의 역사의 희생자가 되었던 공통의 기억을 가진 한.중은 동북아에 화해.협력의 기운을 만들어 가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박병인 한국외국어대 대우교수.중국어>

(중앙일보 2004-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