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년 을지문덕 '살수대첩'

‘4000년 역사 제1의 대위인(大偉人)’ 을지문덕! (단재 신채호)

그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이 끝나자마자 역사의 기록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수(隋)나라 장수 우중문을 우롱했던 ‘오언시(五言詩)’만이 전할 뿐.

대체 그 청사에 빛나는 전략가 을지문덕은 어디로 갔을까.

못내 안타까웠던지 시인 김정환은 ‘상상하는 한국사’를 썼다. “고구려는 ‘공(空)’인가. 일순 찬란한 섬광을 발하다가 사라져버린. 그러나 그 빛이 너무 눈부셔 역사 속에 영원히 각인된….”

하기야 ‘살수’가 어디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청천강을 이름인가, 중국의 능하(凌河)를 이름인가. 일설에는 압록강이 살수라고도 하니.

을지문덕은 ‘위지문덕(尉支文德)’으로 불렸다고 한다. ‘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했으니 왕조시대에도 그의 실권은 왕에 버금가는 것이었을까.

6세기말 수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 동북의 맹주 고구려와 충돌은 불가피했다.

서기 612년, 수 양제는 세계전사에 유례가 없는 113만3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향했다. 그가 이끄는 육군의 주력은 요동성으로, 수군은 황해에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륙양동작전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우중문 우문술 형제의 30만 별동대는 수장돼 2700명만이 목숨을 건졌으니.

수와 고구려, 그리고 이후 당(唐)과 고구려의 격돌은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국제대전(大戰)이었다.

고구려는 말갈을 거느리고 당과 신라에 맞섰다. 백제와 왜도 당과 신라를 견제했다. 당에는 돌궐 거란의 세력이 함께했다. 그러면 이때 삼국통일전쟁은 신라의 한반도통일전쟁이 아니라 당-고구려 전쟁의 국지전이었던가.

최근 의욕적으로 동북아의 고대사를 접수하고 있는 중국.

중국학자들은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을 통일중국이 요동의 군현(郡縣)을 수복하는 국내전으로 본다. 고구려의 옛 땅에 중국역사의 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반도사관’을 연상시키는 ‘신(新)중화제국주의’의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허나, 정작 누가 고구려를 홀대했는가.

“고구려의 역사를 넘보는 중국의 야욕을 방치하고, 일본 우파의 ‘임나(任那)본부설’에 밀리면 한반도의 역사는 결국 한강만 남아 흐르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2004-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