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노리는 중국

(이 기사는 연초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간도 문제를 집중 보도해온 <경향신문>의 자매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소속 윤호우 기자에게 청탁한 글입니다.... 편집자 주)

 
 
레지선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들어진 당빌지도.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레지선'으로 불리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 그려져 있다. 평안이라는 영문지명이 압록강 너머에 적혀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간도문제를 연구하는 한 연구학자는 지난 봄 중국 연변의 한 조선족 대학교수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제자가 한·중 국경문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니 자료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동북공정의 연구 과제로 선정될 것이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5년에 걸쳐 진행되는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일까? 단순히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에 넣기 위해 시작한 것일까.

중국은 이달초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킨 후 외교부 공식 홈페이지에서 한국 역사 중 고구려 부분을 삭제하고 중국 관영언론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소개하는 등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순수한 학문 연구라는 선(線)을 이미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심으로 연구과제가 선정된 동북공정에서는 한·중 변경문제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차로 공개선정된 27개 연구과제 중 13개 과제가 한·중 변경문제와 관련이 있다. 2차로 선정된 15개 과제 중에는 7개 과제가 관련이 있다. 이중 '국제법과 한·중 변경 논쟁 문제'같은 연구과제는 직접적으로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래를 노리는 중국, 과거에 집착하는 한국

 
▲ 중국 도문의 두만강 국경지대에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을 알리는 큰 간판이 서 있다.
 
 
 
  "간도 관련자료 본격 수집 나설 것"  
  간도학회, 7월 24일 첫 모임 가져  
 
 
"과거 청산없는 한중수교는 결국 동북공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간도 영유권의 회복을 늦출 수 없습니다. 정부가 이 일을 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간도학회 발기문에 나타난 글이다. 동북공정을 계기로 간도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될 간도학회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간도학회는 오는 7월 24일 첫 모임을 갖는다.

간도 문제를 연구해오던 사학자, 국제법학자, 정치학자들은 6월 4일 간도학회 준비위를 구성하고 한국간도학회를 출범시켰다. 간도학회 회원들은 동북공정의 핵심목표는 간도영유권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1966년 창립된 이후 간도 문제를 포함해 만주지역에 대한 역사적 문제를 다뤄오던 백산학회는 간도영유권 문제를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간도학회를 발족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백산학회 육낙현 총무는 "간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일단 관련 자료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간도가 우리땅임을 밝힐 수 있는 해외자료와 지도 수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간도학회의 정식 발족식은 9월에 열릴 예정이다. 간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도 학회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간도학회 전화 02-2268-8668)

 
 
최근 발간된 <고구려는 중국사인가>라는 책에서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는 간도문제를 언급하며 '미래를 노리는 중국, 과거에 집착하는 한국'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제목은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두고 한국과 중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 논쟁의 한 단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단순히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간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향후 질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이란 용어 자체도 옛 만주지역으로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간도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한반도의 통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중국이 영유권 분쟁 가능성이 있는 이곳에 대해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나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인천대 법학과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통일 이후 간도 영유권 제기를 근원적으로 없애려는데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영유권 분쟁 문제로 두려워 하는 간도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간도라는 명칭은 '사이섬'에서 유래된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운뒤 텅 비어버린 이 곳은 양쪽에서 들어가지 않도록 설정한 봉금지대였다. 하지만 조선후기 평안도와 함경도 유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몰래 넘어가 이곳을 개척했다. 강 사이의 섬으로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목숨을 걸고 강을 넘어간 것이다. 

이 당시 청의 강희제 때 중국에서 제작된 당빌지도(1737년 제작)와 황여전람도(1718년 제작)에 의하면 조선과 청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 특히 당빌지도에는 압록강 너머에 '평안'이라는 명칭이 적혀있다. 

오랫동안 간도문제를 연구해온 김득황 박사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경계선을 '레지 선'으로 명명했다. 전문가들은 고구려와 발해 이후 중국땅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이곳이 조선땅으로 여겨져 왔다고 주장한다. 

영토에 관심을 쏟았던 강희제는 1712년(숙종 38년) 목극등이라는 관리를 보냈다. 청은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을 선조가 태어난 영산으로 여기고 이 지역을 확보하려고 했다. 강압적 자세로 나온 청은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양국의 경계선을 확정했다. 

비문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한다)이라고 씌어 있다. 양국은 경계선을 설정하기 위해 정계비를 주변으로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를 잇는 나무와 돌 울타리를 만들었다.

조-청 경계선, 토문강 

 
▲ 백두산 정계비문 탁본(왼쪽)과 내용(오른쪽).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자가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후 '토문강'이라는 명칭이 논란이 됐다. 1880년대경 청은 함경도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국경선은 두만강이라면서 두만강 이북의 유민들에게 이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조선에서는 정계비에 적힌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상류인 토문강임을 주장했다. 

당시 중국의 고지도에서 상당 부분이 토문강이 백두산에서 만주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임을 표시하고 있다. 김득황 박사는 "정계비에 나타난 분수령의 의미를 볼때 백두산 정계비에 연결된 강은 압록강과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 뿐이며, 두만강은 이 인근에 있는 강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정계비에 따르면, 압록강이 출발하는 백두산에서 바로 윗쪽으로 토문강이 흘러 송화강에 이르는 만주지역이 조선 땅이 되는 셈이다. 지금은 조선족이 자치주를 이루고 있는 연변자치주 지역이 대부분 이 곳에 속한다. 

1885년(고종 22년) 을유감계담판(국경회담)과 1887년(고종 24년) 정해감계담판을 통해 양측은 국경협상을 벌인다. 당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군대가 서울에 주둔하면서 청은 강압적으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을 확정지으려 했다. 조선측 대표였던 이중하 감계사는 '내 목을 자를 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양보하지 않자 협상은 끝내 결렬되고 만다. 

경인교육대 강석화 교수(조선후기사)는 "국가간의 국경회담에서 일단 영토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게 이중하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이때의 회담 덕택으로 간도의 영토 문제가 아직도 '분쟁 지역'으로 유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우리나라에서는 간도영유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 이 지역의 주민들을 직접 관리하게 한 것이다.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조약으로 간도에 대한 권리는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은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맨처음 간도는 한국땅이라는 논리를 개발한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 등을 얻는 조건으로 1909년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청에 넘겨준다. 대한제국 당시 두만강 너머에 한국과 청나라간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지만 이때 이후 양국 경계선은 두만강으로 고착되고 만다. 

일제 이후 양국 경계선 두만강으로 고착 

 
▲ 백두산 지역의 강물줄기를 나타낸 약도. 정계비를 중심으로 압록강과 토문강이 울타리(검은 부분)을 통해 연결돼 있다. 토문강은 송화강의 지류이다.
 
1945년 광복을 거치면서 일제가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체결한 모든 조약이 무효화됐지만 간도협약은 한반도의 분단 때문에 아직도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을 가르는 근거가 되고 있다. 

국제법 학자들은 을사조약이 무효화된 만큼 이를 통해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일방적으로 체결한 간도협약도 무효라고 주장한다. 노영돈 교수는 "간도협약은 중국의 간도 점유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면서 "따라서 간도영유권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분쟁상태에 있다"고 강조했다. 

간도영유권 분쟁의 또 하나의 변수는 북한과 중국이 1962년 맺은 '조·중 변계조약'이다. 백두산 천지를 양쪽에서 나누고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이 조약은 아직 전문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비밀조약이다. 

간도연구가인 이일걸 박사(정치학)는 "비밀조약으로 국제적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다 동·서독의 예처럼 통일 때 이 조약을 승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독일통일 때 독일은 조약승계에 대한 문제를 다뤘다. 

이 박사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가 통일 후 간도 문제에 있는 것처럼, 한국도 통일을 대비해 간도영유권에 대한 연구를 미리 해둬야 한다"고 밝혔다. 

간도영유권 주장과 관련해 국내 학계 일부에서는 글로벌 시대에 있어 '너무 국수적인 시각'이라는 비판도 하고 있다. 이 박사는 "흔히 간도를 언급하면 옛날 고구려땅을 어떻게 찾느냐며 국수주의자로 몰아붙이지만, 간도영유권은 고구려라는 아주 먼 옛날로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선 후기 우리 선조가 일군 땅을 찾자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중화사상은 더 국수적이고 패권주의적이며, 간도영유권 주장은 우리가 당연히 찾아야 할 권리를 찾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  
  청나라와 맞서 국경 지켜낸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누구?  
 
 
▲을유감계회담과 정해감계회담 당시 감계사였던 이중하의 모습.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사진이 최근 처음으로 공개됐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 

19세기말 토문감계사(오늘날 국경회담 대표자) 이중하는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시켜 간도땅을 차지하려는 청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그러나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역사를 거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됐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한 일간신문 칼럼에서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를 '의인'이라 평했다. 함경도 안변부사였던 이중하는 1885년 조정으로부터 감계사로 임명받았다. 

청은 당시 두만강 이북 지역에 조선 유민들이 늘어나자 이들에게 이남으로 내려가든지 청나라 백성이 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했다. 청은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기 위해 외교문서를 보내 감계담판(국경회담)을 하자고 나섰다. 

이중하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나타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임을 끝까지 주장했다. 이중하는 청 측 대표 덕옥, 가원계, 진영 등과 함께 직접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논란이 된 강의 물줄기를 조사했다. 

정계비 인근에는 압록강과 송화강 지류의 물줄기가 위치해 있었고 정계비와 송화강 지류 사이에는 문헌에 나타난 대로 나무, 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 답사로 청나라 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가지 않게됐다. 아들 이범세가 집필한 이중하의 행장에 의하면 이중하가 목숨까지 위태로운 처지에 있었음을 알게해주는 대목이 있다. 

답사 도중 청의 가원계가 복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보고 이중하는 미리 준비해둔 환약을 써보라고 주었다. 그러나 약을 먹은 후 복통이 더욱 심해지자 청측 대표는 자기를 죽이려고 독약을 준 것이라고 흉기로 이중하를 위협했다. 이때 이중하는 청측 대표 앞에서 남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다음날 아침 복통이 가라앉자 청 측 대표는 정중하게 사과했다고 한다. 

2년 후 다시 청나라는 감계담판을 열자고 했다. 이때에도 감계사로 임명받은 이중하는 정해감계담판에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청측을 요구를 묵살했다. 당시 이중하는 협상 내용을 상세하게 일기로 남겼다. 그가 쓴 <감계일기> <감계전말>은 간도영유권 주장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중하의 기록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사라졌다. 그는 나라를 잃자 아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으로 낙향했다. 퇴직금 명목으로 은사금을 내렸지만 이를 받지 않았고 합병기념 훈장조차 돌려보냈다. 한일합방이 된지 7년후인 1917년 이중하는 나라를 잃은 분노를 잊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오마이뉴스 2004-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