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上)


지난 7월1일 마침내 북한지역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중국 동북지방에 널려 있는 고구려 유적·유물들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됐다. 참으로 자부심을 가질 일이다. 그런데 사태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오히려 심한 우려마저 자아낸다.

중국에서는 이를 계기로 고구려 역사를 자기들 역사로 편입시키고 일반 국민들을 인식시키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각종 기록물에서 고구려사가 한국사라고 기록한 내용을 빼고 백일장, 서예대회 따위를 벌여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려 하고 있다. 더욱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국제적으로 대대적 선전효과를 노리고 있다고도 한다. 세계에서 고구려 유적을 보려고 몰려드는 관광객에게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이 구성한 지방정권이었다”고 선전할 것이다.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왜곡하는 작업의 의도와 배경은 실로 다양하다 할 것이다. 먼저 그 배경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져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만주지방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면서 엉뚱한 행동을 벌였다. ‘고구려는 우리 땅’ 또는 ‘백두산은 우리의 영토’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다녔다. 심지어 ‘고토 회복’이라는 문구도 보였다. 그리고 옌지의 호텔 같은 곳에서 곧잘 만주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므로 우리 땅이라는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 ‘간도는 우리땅’ 주장도 中 자극 -

한편 백두산 천지 마루에서 남쪽에서 가져간 소주나 제물을 차려놓고 울긋불긋한 제복을 입고 천지를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기도 했고 제주를 뿌리기도 했다. 때로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 삼창을 소리 높여 외치기도 했다. 지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처음에는 바라보며 구경을 하다가 나중에는 안내하는 조선족을 잡아 벌금을 물렸으며, 일송정 같은 유적을 훼손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구려 유적지를 폐쇄하고 남쪽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했다. 또 중국 학자들과 만나서는 고구려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면서 간도(間島)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했고 북한과 맺은 천지분할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 다룬 기사들이 서울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심심찮게 게재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난 뒤 연달아 민족분쟁이 야기되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티베트의 분리독립을 인정치 않고 탄압해 왔으며 러시아, 베트남과는 오랫동안 국경분쟁을 야기하고 있었다. 중국에는 50여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이들에게 자치구 또는 자치주를 설정하여 민족 고유의 언어 풍속을 유지하며 살게 조치했다. 다만 자기 민족의 역사만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지린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족 자치주도 그들 속의 하나이다.

한편 9백만명에 이르는 만주족 또는 수백만명에 달하는 몽골족과 위그르족이 자치수준에서 벗어나 독립을 요구하려는 움직임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만일 1백만명이 넘는 조선족이 간도를 중심으로 독립을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연찮게도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 홈페이지는 동북공정에 대해 “동북변경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발전을 촉진키 위한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런 다음 “동북 아시아는 10년 전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역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북조선·한국·몽골·일본·미국 등의 국가와 중국이 갖는 쌍무관계는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학술연구와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고구려사를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한국사로 보아왔다. 중국 역대의 역사책들은 고구려를 백제·신라와 함께 동이(東夷)의 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기술해 왔다. 이어 고구려가 당 나라에 멸망된 뒤에는 발해가 이를 계승했으며 다시 고려가 고구려의 계통을 이었다고 써왔다.

하나의 사례만 들어보자. 서긍은 1123년 중국 송나라의 사신으로 한달 동안 개성에 머물렀다. 그는 본국에 돌아가 송 황제 휘종에게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바쳤다. 거기에 당나라 말기에 고구려·발해를 계승하여 ‘복국’(復國)한 것이 왕씨의 고려라고 설명하고 왕도를 개성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런 내용은 송사(宋史)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993년 요의 소손녕이 침입했을 때 화의교섭에 나선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터전을 잡았다”고 하여 물러날 것을 요구하자 소손녕은 이를 부정치 않았다. 또 조선 전기 최부는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중국 베이징을 통해 귀국했는데 그가 중국 인사를 만났을 때 그대 나라(고구려를 뜻함)는 무슨 힘이 있어 수당(隋唐)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냐는 질문을 곧잘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고구려를 한 점 의심 없이 우리나라 역사라 하여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을 받들었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을 당한 뒤 많은 인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중국 사람들은 거의 이들 망명객을 보고 ‘꺼우리 팡즈’(高句麗 幇子)라고 얕보는 말로 깔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난폭하고 망나니 같은 사람들을 보면 이 욕설을 내뱉는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조선사람들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꾸짖은 것이다.

- 94년부터 ‘고구려史 편입’ 본격화 -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배우고 알고 있듯이 이런 역사의식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연의 ‘삼국유사’,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역사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외된다고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역사학자들은 1980년대에는 일사양용(一事兩用)을 들고 나왔다. 곧 한 가지 사건을 두 가지로 수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일 수도 있고, 한국 역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연구하는 것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1994년부터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정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고구려 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므로 소수민족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2000년부터는 고구려사 연구자를 양성하는 사업을 벌여 100여명의 학자가 자료수입 또는 유적 발굴에 참여했다. 이들 학자는 고구려의 역사를 국내성을 수도로 정한 시기는 중국사,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경향신문 2004-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