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동북아 신뢰구축 ‘발목’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동북아 긴장 ③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과 중국의 첨예한 역사논쟁의 시발점이며, 향후 한­중관계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새로운 변수가 될 것이다.” 외교안보연구원은 지난 3월 펴낸 한 보고서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중관계 발전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끼워맞추려는 동북공정이 ‘역사논쟁’이라는 ‘이제껏 없었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한­중 협력관계의 장래에 먹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가 삭제되고, 정부가 외교적 대응을 함으로써 이런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다.

최근 한­중관계는 탈북자 처리와 서해 조업, 배타적 경제수역(EEZ) 획정 등을 놓고 보이지 않는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1992년 수교 이후 급속하게 가까워진 두 나라 관계가 한층 성숙한 단계로 진입하느냐를 가늠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사라는 민감한 문제가 엉켜들면서 일각에선 한­중관계 전반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마저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 문제의 파장은 한­중관계에 국한하지 않는다. 좁게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넓게는 일본을 아우른 동북아의 장래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폭발력을 안고 있다. 해묵은 역사논쟁과 영토분쟁의 숙제를 풀지 못한 채 ‘집단적 기억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중­일 3국이 또다른 과거의 문제에 휘말려 전진의 동력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92년 수교뒤 ‘성숙한 단계’걸림돌 우려
한-일 중-일 마찰 맞물릴땐 ‘동력’상실

고구려사 문제는 당장 한­중­일 3국의 역사논쟁 구도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은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종군위안부 문제에 공동으로 맞서 ‘2대 1’의 구도를 이뤘으나, 이제 각각의 현안에 맞대응하는 ‘1대 1’의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이 생겨났다. 한­중­일이 역사해석을 놓고 각개약진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동북아 전체 역사가 한­중­일의 역학관계에 의해 뒤틀리는 상황도 예견할 수 있다.

고구려사 해석을 둘러싼 한­중 갈등이 독도와 댜오위타이를 둘러싼 한­일, 중­일 영토분쟁과 얽힐 경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냉전 종식 이후 다자적 신뢰 구축을 모색해 온 동북아의 시계바늘을 뒤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를 비롯해 한­미동맹 조정, 중국의 급부상과 일본의 재무장으로 인한 패권 경쟁 등 동북아의 안보지형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중­일 3국의 불신과 반목은 이 지역의 평화 정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자유무역지대 추진을 축으로 펼쳐지고 있는 한­중­일의 경제협력 구상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중­일 3국의 역사논쟁과 영토분쟁이 이처럼 폭발력을 갖는 것은 그 밑바탕에 다분히 자기 중심적인 민족주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이 한반도 통일 이후 만주지역에 대한 도전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입지를 잃은 사회주의를 민족주의로 대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일본 또한 1990년대 이후 이른바 보통국가를 지향하면서 사회 전체가 급속히 우경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 역시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축적된 국민적 자부심이 민족주의의 고양을 불러온 게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의 지역패권 경쟁은 이런 민족주의적 대치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아시아의 중심으로 재등장한 중국과 이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전략적 경쟁은 역사논쟁과 영토분쟁에 대한 합리적 해법을 찾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들에게 유럽통합 과정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보여준 지도력을 기대하기란 힘든 게 현실이다. 고구려사 문제는 중국과 일본의 이런 대립 속에서 중간국가로서 그 나름대로 역할을 모색해 온 한국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죽은 고구려가 살아 있는 동북아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중 “무시하는게 상책”
한국,일본 독도 문제제기 무응답과 비슷

한국과 주변국의 ‘역사논쟁의 역사’는 길다. 한국이 현재 중국과 치르고 있는 고구려사 논쟁은 최근의 일에 속한다. 일본과는 오래 전부터 임나일본부설 해석, 역사교과서 편찬 문제 등을 놓고 대립했다. 독도 영유권과 동해 표기를 둘러싼 마찰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은 일본과 역사논쟁에서는 공격과 수비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대처했으나 영토 문제에서는 대체로 방어에 치중했다. 특히 독도 문제에서는 의도적으로 일본의 문제제기를 무시했다.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지역을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의 노림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이런 전략은 독도 문제가 영토분쟁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과 고구려사 논쟁에서는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사 문제를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정부나 학계에서 “고구려사를 잃는 것은 우리 역사의 뿌리를 잃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중국은 독도 문제에서 한국이 취한 태도와 비슷하게 대응하고 있다. 고구려사의 무대를 대부분 자국의 영토로 확고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러면서 고구려 유적을 북한과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등 차근차근 ‘영토의 역사’에 대한 구심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중 역사논쟁이 영토분쟁으로 발전할 것인지는 고구려사 문제를 푸는 데 매우 중요하다. 중국 동북공정이 한반도 통일 이후 만주에 대한 주변국의 도전을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학계 일각에선 한반도 통일 이후 간도 문제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한반도가 통일되더라도 국제정치 현실을 감안할 때 간도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 것”이라며 “그런 사정을 감안하면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소탐대실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중협력 긴요한 시기에‥”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 “중국서 시간달라 요청”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에서 새로운 협력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선 한­중 협력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중 간에 역사해석의 문제가 공론화되어 안타깝습니다.” 정부의 고구려사 실무대책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21일 “고구려사 문제에 중국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중 협력의 중요성 때문”이라며 고구려사 문제가 한­중관계, 나아가 동북아 신뢰 구축에 끼칠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고구려사 문제는 “우리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며 “어느 나라나 민족의 정체성을 뿌리째 부정하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과 국무원 기관지들이 고구려를 지방정권으로 보도하고, 외교부 공식 홈페이지에서 고구려를 삭제함으로써 이 문제가 외교 현안으로 발전했다”며 “중국의 태도는 양국 국민들에게 역사에 대한 오해를 심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교채널을 통해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가 삭제된 데 강력히 항의하고 경위를 물었으나, 중국 쪽으로부터 아직 뚜렷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며 “정부는 현재 냉정을 유지하면서 중국 쪽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 외교부가 시간을 좀더 달라고 요청하는 만큼 통보 내용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적절한 대응책을 모색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부 중국 학자들이 한반도 통일 이후 고구려 영토에 대한 분쟁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것은 국수주의적 학자들의 과민반응”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사가 한민족의 역사라는 엄연한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며 “한­중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서로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구려사 실무대책협의회는 외교부와 통일부, 교육인적자원부, 문화관광부, 국가안전보장회의 국장급 간부들로 구성된 대책기구로,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책을 찾는 일을 맡고 있다.

(한겨레신문 2004-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