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는 전쟁중

한·중 역사 전쟁, 중·일 에너지 전쟁이 불을 뿜었고 한·일 간의 동해 표기를 둘러싼 갈등과 독도 영유권 분쟁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삼국 간 갈등은 표면적으로 역사 인식과 배타적 경제수역(EEZ)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나 그 기저에는 동아시아와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과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짙게 깔려 있다.

고구려를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의 동북공정과 빨라지고 있는 일본의 개헌 및 군사 대국화 움직임은 강화되고 있는 내셔널리즘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 처음 시작된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역사 왜곡은 고구려 유산의 세계 문화 유산 등재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확고히 굳어져가고 있다. 동북공정은 역사 문제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통일 한국’을 견제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 성격이 강하다. 노무현 정권이 동북아 중심 국가 건설을 국정 지표로 내세운 이후 동북공정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중국의 의도는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킴으로써 통일 후 일어날지도 모를 간도 지역의 영토 분쟁과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 등에 대해 미리 쐐기를 박으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내년에 역사교과서를 개편하고 2006년 동북공정 최종 보고서를 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 큰 문제는 세계 무대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날로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다수 국가들이 중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조지아주 시아일랜드에서 열린 G8 정상회의가 끝난 뒤 참가국 사이에 “세계 6위의 경제대국 중국이 빠진 G8회의는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중국의 위상은 확고해졌다.

일본은 자위대에 집단적 자위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현행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는 등 우경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지난 11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선 개헌에 반대하는 사민당과 공산당이 지역구에서 전멸하는 등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또한 개헌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자위대의 이라크 다국적군 참여와 국민연금법 개정을 놓고 집권 자민당과 대립했던 제1야당인 민주당도 개헌 찬성 입장을 밝혔다. 국익과 부합된다는 판단에서다.

이미 유사법제를 완비해 군사 대국화의 토대를 닦은 일본이 헌법까지 개정하면 자위대가 명실상부한 군대로 재탄생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세계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주일 미군이 아시아·태평양과 중동까지를 통괄하는 사령부로 재편될 경우 그에 맞춰 자위대 체제를 개편하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구상이다. 주한 미군 감축으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힘의 공백을 일정 부분 자위대가 책임지는 쪽으로 미·일 간에 협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는 2차 대전 후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북방 영토의 반환을 외교 최우선 과제로 채택했다. 이는 독도 문제 역시 종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일본은 또 EEZ 경계선 상에 위치한 동중국해의 춘샤오 가스전 개발을 둘러싼 중국과의 에너지 전쟁에서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중국측이 천연가스를 채굴하기 위한 플랫폼을 건설하자 부근 해역에서 독자적인 가스전 개발을 추진하는 등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지난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는 북방을 중시하겠다는 의미에서 ‘광개토 프로젝트’를 제시했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언제 그런 것이 있었느냐는 듯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정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참여정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동북아 중심국가론도 당초 내용에서 크게 축소됐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던 때도 있었다.

상황이 예전에 비해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전쟁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전투에만 몰두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모든 화력을 국익에 집중하고 있는 데 우리는 친일파 조사 대상 범위를 어디까지 하느니, 행정수도를 옮기느니 마느니 끊임없이 갈등만 확대 재생산하며 화력을 분산시키고 있다.

국민은 17대 국회에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그 기대는 서서히 실망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국가적 과제는 당리당략에 파묻혀 사장되거나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전투에서 이긴들 전쟁에서 진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국민일보 / 이흥우 기자 2004-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