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가나안'' 고구려를 찾아서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때는 외국서점에 꽂힌 김일성선집 앞에만 서 있어도 두려움에 떨었다. 그 자체만해도 반공법 위반이 아닌가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1985년 일본 오사카의 한 백화점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전’이 열렸다. 때마침 그 곳을 여행중이어서 국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북한 문화재를 운 좋게도 관람할 수 있었다.

벽화는 고분의 모습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인공무덤 안의 벽에 사진으로 전시되었다. 문화재는 어느 곳에 있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아무런 부담없이 그 황홀한 신비에 넋을 잃으며 한나절을 안에서 머물렀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위대한 문화였다. 1500년만에 잠을 깬 고구려인의 늠름한 기상과 당시의 생활상은 경이로왔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 문물보관소가 발굴한 장천고분과 북한의 안악고분 벽화화가 잃어버린 역사를 일깨워 주었다. 전시와 함께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북한에서는 김일성대학 주강현 교수가 고구려 역사를 강조했고, 회의장 복판에는 모조품 광개토대왕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전 관계기관에 문의했더니 신분을 밝히지 말고 경청만 하라고 당부했다.

북한 학자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고구려라는 국가가 그렇게 위대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 전시와 세미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보도였다. 당시 통신사의 문화부장이 특종인 고구려 고분을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북한 보도를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던 반공이 국시였던 때여서, 당국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다. 귀국후 관계기관에 전화를 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보도를 해서는 안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은 신라이지 고구려가 아니다”는 기막힌 답변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세기적인 특종은 뭍혀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신문사는 벽화를 그 당시로는 드물게 칼러판으로 제작해서 막 배포하려는 순간 절대로 안된다는 관계기관의 제지로 폐기 처분했다는 후문이었다. 막대한 제작비가 사라진 셈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순수한 학술교류마저 반공이데올로기에 막혔던 암울한 시절의 비화다. 학계에서도 모르긴 몰라도 고구려사 연구는 자연히 소홀하게 여겼을 분위기였을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가 예산 8천만위안(1백20억원)을 들여 보수한 지안시 박물관 안내판에는 ‘고구려가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보도(한국일보)다.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목소리는 학계의 일부 주장이 아니라 중앙정부가 깊숙히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 곳의 한 안내원은 “고구려는 동북아지역의 고대 문명국가지만 그 역사는 중국 고대사에 포함된다”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중국은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하면서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보며, 남한은 신라의 후손, 북한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말하더라는 보도다. 지금의 조선족은 이씨조선 때 중국으로 넘어온 것으로 본다고 했다. 고구려가 아니라 역사의 정통성은 신라라고 말하던 기관원의 학설(?)과 흡사하다. 우리 학계가 무관심하고, 북한이 강대국 중국의 눈치를 보는 사이 우리의 고구려는 역사의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세계 각국을 떠돌아 다니던 유대민족은 가나안 땅이 하느님이 준 복지라는 선민의식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가나안에는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묻힌 곳이다. 모세가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며 찾은 가나안은 하느님이 내려준 유대민족의 영원한 고향이었다. 그후로도 지구 곳곳을 유랑하던 유대인들은 1차대전이 끝나자 모두 가나안으로 몰려 들었다. 그리고 잃었던 땅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피나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엄연히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고구려를 지키지 못하는 후손들은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가. 역사의 정통성을 배신하고 역사마저 남북 대결로 해석하는 이 못난 후손들은 눈 뜬채 고구려 역사가 중국사 속으로 편입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처지다. 남과 북이 손을 잡고 강대국 고구려를 다시 찾자. <칼럼니스트>

(세계일보 2004-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