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릉, 왜 다시 파묻혔나

⊙기자: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에서 왕릉이 하나 발견됐습니다.

바로 백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이었습니다.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과 축조연대가 밝혀진 왕릉.

그것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1500여 년 전의 유물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령왕릉은 베일에 싸여 있던 백제사를 규명하는 열쇠가 됐습니다.

국보 18점을 포함해 유물 3000여 점이 출토되면서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 큰 획을 그은 무령왕릉 발굴.

그러나 그 발굴 이후 33년이 지난 지금 이 왕릉은 보시는 것처럼 입구가 굳게 닫힌 채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해 놨습니다.

무령왕릉의 이상징후가 뚜렷해진 것은 지난 96년.

공주의 한 대학연구소가 무령왕릉에 대해 1년여에 걸쳐 정밀조사를 했지만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무덤의 벽이 안쪽으로 기울면서 천장에 박힌 벽돌들이 빠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또 석식 내부에 습기가 차고 이끼가 자라는 등 왕릉 내부가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습니다.

⊙김광훈(공주대 생명과학과 교수/당시 무령왕릉 정밀조사팀): 무령왕릉을 처음 갔을 때 막막했죠.

전체 구조가 한쪽으로 기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손을 댔다가는 이게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기자: 무령왕릉이 이렇게 훼손된 가장 큰 원인은 발굴 직후 문화재 당국이 사적지 조성을 하면서 무덤 위에 흙을 높이 덧씌웠기 때문입니다.

⊙조유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당시 무령왕릉 발굴단원): 무령왕릉 봉분이 이 정도는 됐을 것이다 하고 소위 우리가 추측해서 봉분을 마련한 거죠.

4, 5m 정도 쌓았죠.

⊙기자: 발굴 당시 파손된 상태로 발견된 벽돌은 430여 장, 그러나 96년에는 1000여 장으로 2배 이상 늘어나 있었습니다.

왕릉 내벽이 덧씌운 봉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서서히 기울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결국 문화재 당국은 지난 98년 무령왕릉을 덮고 있던 봉토의 일부를 다시 깎아내렸습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고려 없이 겉모습만 중시했던 문화재 정책이 빚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습니다.

이제 무령왕릉의 내부는 보시는 것처럼 모형으로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공주시와 문화재관리당국이 지난 97년 무령왕릉의 일반인 공개를 금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무려 1500년 동안이나 원형이 보존됐던 왕릉이 발굴 25년 만에 관리 소홀로 제모습을 잃고 다시 어둠 속에 파묻힌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관리를 제대로 못해 무령왕릉을 폐쇄하는 사이 일본의 한 작은 섬에서는 해마다 무령왕의 탄생을 기리는 축제와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섬의 주민들이 이 무령왕을 기리는 이유는 무령왕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는 일본 고대 역사서의 단 한 줄 기록 때문입니다.

중국은 최근 자국 영토 내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를 자국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리고 이달 초 광개토대왕릉비를 포함한 고구려 유산 일부가 중국 명의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역사는 지키고 보존하는 자의 것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부실한 관리로 25년 만에 문을 닫고 만 무령왕릉.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우리들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사건파일 이석재입니다.

(KBS 2004-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