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 중국서 제작” 과학역사도 왜곡 ‘황당한 논리’

고구려가 중국에 빼앗길 위기에 처해있다. 중앙정부가 지원하고, 사회과학원이 주도하는 동북공정에 의해 학술적으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한국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고구려를 삭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중국 정부가 고구려를 자신의 나라로 삼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남의 나라 역사를 무단으로 빼앗는,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인들의 일련의 처사를 보면서 과학사 학자들은 물론이고 관심 있는 이들은 알 만큼 다 아는 해묵은 이야기를 이 귀중한 지면을 빌려 상기시켜 본다. 혹시라도 새롭게 알게 되는 독자가 한 명이라도 더 생기게 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다라니경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인정받는 귀중한 과학기술의 유물이다. 1966년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우연히 발견된 후, 705년 전후의 인쇄물로 판명되어 세계 인쇄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다. 다라니경의 발굴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 8만개의 목판을 자랑하는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우수한 인쇄문화를 다시 한번 입증해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의 이해와는 전혀 다르게 중국인들은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인쇄되었으며, 한국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당나라의 측천무후 시기(690~705년)에만 쓰이던 특이한 한자가 다라니경에 적혀 있다는 것이 당나라에서 인쇄되었다는 주장의 논리이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그들이 쓰던 한자를 신라에서 도입해 썼다는 것을 억지로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다. 심지어 다라니경의 종이가 당나라 것이 아니라 신라 것이라는 일본 보존과학자들의 분석 결과도 중국 학자들은 일부러 무시하는 듯하다. 이와 같이 중국과 한국의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뜨겁지만, 중국 과학사의 최고 권위자인 조지프 니덤이 그의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중국인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다라니경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

다라니경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측우기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측우기는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로, 유럽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카스텔리의 우량계(1639년)보다 무려 198년이나 앞서서 세종 23년(1441년)에 발명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러한 측우기 발명과 사용법에 대한 자세한 역사 기록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물론 중국의 어떠한 역사서에도 측우기 발명과 사용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현존하는 측우기 유물도 없다. 중국의 학자들이 측우기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논거는 현존하는 우리의 선화당 측우대(보물 842호)에 ‘건륭 경인 오월’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건륭은 청나라 고종황제의 연호이고 경인년은 1770년이다. 청나라 연호가 사용된 유물은 전부 중국의 것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중국인들은 선화당 측우대가 청나라의 고종황제가 만들어 조선에 하사되었 듯이, 세종대의 측우기도 명나라에서 제작되어 하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주장에 조지프 니덤이 동조하면서 다라니경과 마찬가지로 측우기는 중국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 동안 많은 과학사 학자들이 다라니경과 측우기를 반환받기 위해 많은 학문적 노력을 벌였지만 소용이 없다. 중화의식으로 무장한 중국 학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고구려사도 한번 빼앗기면 되돌리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학문적 노력’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듯하다.

<문중양/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과학사>

(경향신문 2004-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