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구려-현 한반도 무관” 주장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동북아 긴장 ② 한국인에 ‘고구려 관광’ 팔기 모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최근 현안은 고구려 관광상품 개발이다. 지난 1일 장쑤성 쑤저우에서 열린 제28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지안시 일대의 고구려 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다음날인 2일 지안시는 박물관, 국내성, 장군총, 태왕릉, 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 환도산성 등 유적지를 일제히 일반에 공개했다.

지안시는 지난해 여름부터 1년 동안 유적지의 보존에 영향을 준 가옥 500여 채를 모두 철거하고 유적지 주변에 풀밭과 오솔길을 조성했다. 지난 14일 지안에서 만난 시 관계자에 따르면 이 유적지 주변정리 사업에 중앙정부 지원 예산 2억위안(약 300억원)이 들어갔다. 그 결과 유적지 주변의 경관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에 따라 지안시 동쪽 언덕 위의 장군총에서 시내 쪽을 바라보면 예전과 달리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광개토대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이 고구려 유적지에 이렇게 극진한 관심을 기울인 건 2002년 북한이 평양 일대 고구려 유적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등재 신청을 추진하면서부터다. 2002년 이전 중국의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정책은 방치로 일관했을 뿐이다. 지안시에서 ‘방치’의 대표적 사례는 국내성터였다. 훼손이 가장 극심했던 국내성 서쪽 성벽엔 판자집이 달라붙어 있었고 주민들이 물건을 늘어놓거나 아이들이 성벽에 오줌을 싸고 다녔다. 지난해 이 집들을 모두 철거한 뒤 주변에 풀밭을 조성해 비로소 고구려 옛 수도의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안시 관계자에 따르면 시는 국내성 사대문 안에는 앞으로 건물 신축 허가를 내주지 않을 방침이다. 낡고 수명이 다한 건물을 점차 헐어나가면 국내성은 좀더 쾌적한 유적지 공원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이 관계자는 설명한다.

지안시는 고구려 유적지를 관광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성 정부와 협력해 비행장 건설과 선양~지안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지안시 관계자들이 생각하는 ‘교통문제 해결’이란 한국인 관광객이 지안시에 올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지의 주요 고객이 한국인 관광객이기 때문이다. 비행장 건설도 한국과의 직항편 연결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북한유적 유네스코 등재 추진에 '화들짝'
일부 새단장…백암성은 연나라 유적 둔감
조선족에 '고구려놈' 호칭 역사의식 노출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로 오늘날의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한국인이 그저 고구려에 대해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부는 지금 한국인의 ‘오해’를 바탕으로 고구려 유적지에 천문학적인 혈세를 쏟아부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는 엄청난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정책담당자가 고구려-한국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든가, 그게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물사관에 입각해” “고구려와 한국은 무관하다”고 주장해온 양춘지 퉁화사범대 교수 등 ‘동북공정 사관’의 입안자들이 중국의 관광사업을 파탄시키기 위한 ‘반혁명적 책동’을 부리고 있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고구려가 한국과 무관하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고구려 관광지를 개발하는 것도 이중적이지만, 어떤 고구려 유적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받들면서 다른 고구려 유적지는 허물어지도록 방치하고 있는 태도도 이중적이다.

예를 들어 지안시 외곽 2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우뉘펑 고구려 채석장의 경우 입장권에 ‘채석장’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아무런 설명도 없다. 채석장 현장에는 1993년 붉은 글씨로 바위 위에 ‘고구려 채석장’이라고 새겨 놓은 흉물스런 글씨가 있다. 고구려인들이 거대한 화강암을 두부 썰 듯 잘라내고 다듬어 퉁거우 고분군 지역이나 국내성으로 운반해간 곳이 바로 이곳 채석장이다. 중국 황하문명에선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의 독특한 적석문화를 유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유적지임에도 현장엔 이 유적의 역사문화적 함의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다.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에 속하는 덩타시 쓰다야오전에 있는 고구려 성곽 백암성도 중국 정부의 방치로 나날이 허물어져가고 있는 고구려 유적의 대표적인 사례다. 고구려의 최전방이던 요동성을 지키기 위한 군사 요충지 백암성은 15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옛 모습을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93년 갑자기 이곳에 ‘연주성산성’이라고 쓴 푯말을 박아놓은 것 말고는 이 희귀한 유적지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한 게 없다. 지난 15일 확인해본 결과 랴오양시에서 판매되고 있는 지도 세 종류 가운데 백암성이 표시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암성 바로 아래에서 3대째 살아온 퍄오(60) 할아버지에게 이 산성의 이름을 묻자 중국어로 또박또박 “가오거우리 바이옌청”(고구려 백암성)이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지역 주민 누구나 지금도 이 성을 “가오리청”(고구려성)이라고 부른다. 퍄오에 따르면 어느날 갑자기 중국 당국이 이곳에 ‘연주성 산성’이란 이름을 붙였다. 전국시기 연나라가 이곳까지 미쳤음을 근거로 고구려 산성을 연나라 산성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지안시 일대 이외의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중국의 태도를 볼 때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기엔 너무나 고구려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그게 아니면 자국 영토내의 문화재에 대한 일관된 정책을 만들어내지 못한 문화 후진국이라 할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중국의 서민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지안 우뉘펑 고구려 채석장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이곳의 관광안내원 겸 산림관리원인 츠상위(55)에게 “고구려와 중국 중원정부는 무슨 관계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젊잖게도 “그런 문제는 우리로선 말하기 곤란하다”고 회피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고구려와 오늘날 한국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고구려는 한국의 (고대) 국가 가운데 하나 아닌가.” 한 가지 더 물어보았다. “중국인이 조선족을 욕할 때 뭐라고 부르는가.” 츠는 묘한 표정으로 계면쩍게 웃으며 소리쳤다. “가오리 방즈(고구려놈들)!” “왜 조선족을 ‘고구려놈들’이라고 욕하는가.” “고구려나 조선이나 다 같기 때문이지 뭐.” 중국 서민의 역사인식은 이러하다. 츠는 성 정부에서 인정하는 관광안내원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며 성 문물국의 집체교육에도 참가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중국 정부의 주장이 억지라는 걸 너무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지금 중국 서민들조차 다 아는 고조선·고구려와 오늘날 남북한의 관계를 억지로 떼어내려는 몽니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2004-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