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백성지킨 ‘산성 나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유적 중에는 고분 이외에 성곽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환런의 오녀산성, 두 번째 도읍지인 지안의 국내성과 환도 산성 등이 그것이다. 그만큼 성곽은 고분과 더불어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성곽 중 많은 숫자는 산성이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도 많은 산성을 쌓았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많은 기존의 산성들을 보수하거나 새롭게 만들었다. 그 결과 중부 이남에만 1000개 이상의 산성 터가 확인되고 있어서, ‘성곽의 나라’, ‘산성의 나라’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산성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과 맞서 싸우는 요새였다. 이런 목적을 이루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거주지나 창고 등 각종 시설물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했다.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산성이 갖춰야 할 조건이었다. 이런 곳을 택해서 산 정상 7, 8부 능선에 산봉우리를 둘러싸는 성벽을 쌓거나,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능선 위에 성벽을 쌓았다.

성벽에는 전투에 대비한 시설을 설치했다.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성문을 보호하려고 성문의 바깥으로 성벽을 이중으로 둘러싸는 옹문을 만들었다. 성에 접근하는 적을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려고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치성(雉城)도 있었다. 또한 적이 알기 어려운 으슥한 곳에 외부로 통하는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을 두어 물자를 운반하거나 병력을 지원받고, 적에게 역습을 가하는데 이용했다. 이러한 산성의 축조 방식은 고려 이후에는 평야 지역에 만드는 읍성이나 도성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돌로 쌓은 읍성에는 산성에 있었던 방어시설들을 갖추었다. 조선 후기 정조 때 도성을 옮기려고 쌓은 수원의 화성에서도 이러한 시설들을 볼 수 있다.

적이 쳐들어오면 사람들은 산성으로 자리를 옮겨 항전을 했다. 적군이 식량을 구하면서 장기간 머물 수 없도록 평야 지역을 깨끗이 비워 놓고 산성을 거점으로 전투를 한 고구려의 청야수성(淸野守城) 전술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나라 군대를 격파한 요동성 전투나, 당나라 공격을 막아낸 안시성 전투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군에 맞섰던 것도 이러한 전술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미 한양을 점령한 청군은 보급물자와 병력을 쉽게 지원받을 수 있었으나 조선군은 산성에서 고립되었으며, 장기간 항전하기에는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교원대 교수>

(한겨레신문 2004-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