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가 아니다(유물과 유적 비교 연구)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중국은 지난해 고구려 영토인 동북3성(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을 복원하고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중국역사 편입의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중국은 오는 6월 28~30일 유네스코(UNESCO) 총회를 쑤저우(蘇州)에 유치해놓고 고구려 유물-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도할 예정이다.
고구려 문화재는 2001년 북한이 북한지역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무덤떼)에 대해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했으나 중국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중국은 당시 동북 3성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에 대해 공동 등록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거절하자 잠정목록을 제출하는 등 독자적인 등재 의도를 나타냈다.
중국은 고구려 유물-유적의 세계문화 유산 등재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총력을 기울여 고구려 유적지 주변을 정비하는 한편 유네스코 총회까지 유치해 놓았다.
따라서 북한의 고구려 유물-유적의 세계문화 유산 등재문제는 이번 쑤저우총회에서 중국의 목록과 함께 다시 논의될 예정이다.
중국이 신청할 고구려 세계문화유산은 첫 수도였던 홀본성, 국내성, 환도산성, 광개토태왕비, 왕릉급 무덤(12기)와 딸린 무덤(1기), 귀족무덤(26기)과 고분 벽화 등으로 알려졌으며 북한은 평양과 남포,안악 및 평안남도의 무덤과 벽화들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역사문화재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물-유적은 모두 129개국에 5백82개에 이르며 한국에도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경판전, 종묘, 화성, 창덕궁, 고인돌군, 경주역사지구 등 7개 소가 등재되어 있다.
한편 고구려 유물-유적의 중국역사 편입시도는 국내외 학계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구려 유물-유적은 중국의 유물-유적과 달리 독창적인 축조 양식과 고구려인의 독특한 생활 방식이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의도는 견강부회라는 반응이다.
고분의 축조방식이나 벽화에 나타난 내용은 중국의 것과는 차별성이 많으며, 산성과 유물들도 중국의 전통적인 양식과는 전혀 다른 고구려만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 고구려 벽화무덤과 중국의 벽화무덤(1) >

고구려 벽화와 중국 벽화의 차별성과 독자성을 규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무덤의 방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였다. 벽화무덤은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고 벽화의 내용과 구성방식, 표현기법 등도 시기에 따라 바뀌었다.
고구려 무덤 건축은 중국의 단조롭고 밋밋한 양식과는 달리 돌각담무덤, 돌기단무덤, 돌칸흙무덤 등 다양한 종류의 웅장한 무덤들을 축성하였다고 남일룡 김일성종합대 교수는 ‘2004 남북공동기획 고구려문화전’에 제출한 그의 논문 ‘동방의 천년대국 고구려’에서 주장한다.
고구려의 돌각담무덤은 일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 순전히 돌만으로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중국에는 물론, 백제 신라 가야 등에도 없었다.
둘째로, 무덤의 형식이 크다는 것이다. 이 특성은 주검을 안치하는 돌곽의 바닥을 지면보다 높게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서 무덤무지를 만들었으므로 무덤이 방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로, 무덤을 방대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주검을 안전하게 안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덤을 견고히 만들어야 했다. 장군무덤의 경우 커다란 화강암을 계단 형식으로 쌓아올린 7계단의 무덤 무지는 웅장하면서도 안정감을 준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중국 지안(集安) 우산하 41호 무덤과 벽화는 요동 및 낙랑지역의 한(漢), 위(魏), 진(晋)나라 시대 벽화무덤의 영향을 받아 축조,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무덤축조 및 벽화제작 방식이 고구려에 수용된 이후에는 곧바로 창조되어 고구려화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357년경 제작된 안학3호무덤(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벽화의 인물들이 전형적인 중국계 복식을 하고 있는 반면, 408년에 그린 덕흥리벽화무덤(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인물들은 이전보다 고구려화한 복식을 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 고구려벽화와 한대(漢代) 및 위진 남북조 벽화

고구려 벽화고분은 동아시아 고분 미술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박아림 연구원(고구려 연구회)은 주장한다.
고구려 벽화가 발달한 3세기에서 5세기는 중국에서 한이 멸망한 후 위진(220~386) 남북조(386~581)가 성립한 시기에 해당된다.
우선 중국의 이민족 중에서 7세기까지 고구려와 같이 많은 벽화 고분을 세운 민족은 찾아볼 수 없다.
위진 시대 북서 중국과 북동 중국에 세워진 벽화 고분들은 단명한 왕조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300년 이상에 걸쳐 발달한 고구려 벽화 고분과 같은 깊이나 변천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남북조시대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원지역을 차지하고 중국을 통일한 북위 시기 선비족에 의해 세워진 벽화 고분의 발굴은 현재까지 소수에 불과하다.
북위시기 다소 침체기를 겪은 벽화 고분의 전통은 남북조 후기에 와서 다시 출현하기 시작한다.
고구려 벽화 고분이 발달의 정점에 달하여 신비스런 사신도 고분으로 변화해갈 무렵 중국지역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동위 시기부터의 벽화 고분의 전통은, 고구려가 이미 발달시킨 후 사용되지 않게 된 인물풍속도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독특하다.
후기 북조에서부터 당대, 그리고 요, 금, 원에 이르면서 벽화 고분에는 주제와 표현의 단순성, 간결성, 소박성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 무용총에서 수립된 벽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고구려 벽화의 공헌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 교훈적인 소재의 부족은 비한족 이민족인 선비족에 의해 세워진 북조 고분과 대조가 되어 흥미롭다.
고원 칠관화나 사마금룡고분의 칠병풍에서 보듯이 효행도와 여사잠도와 같은 주제가 북위 고분에서 장식의 주제로 선택되었다.
고구려 감신총(남포시 와우도구역)과 덕흥리고분(평양 덕흥리)에 서왕모와 견우직녀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들은 역사고사보다는 전설의 인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 중국의 역사고사에 기초한 소재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고구려 벽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자기 식으로 소화한 것임을 나타낸다.
집안에서 선호된 소재들은 수렵도(약수리벽화, 무용총벽화, 장천1호분벽화 등)와 고구려 고유의 무용도로서 이 지역 고구려인들이 이러한 종류의 소재에 대해 강한 친근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와 같은 생활풍속도가 본격적으로 한대 벽화고분에 등장하는 것은 동한시기로 하북성 안평고분, 하남성 밀현고분, 내몽골 화림격이(和林格爾)고분 등이 있다.
비교적 최근에 발굴된 여러 기의 낙양 지역 벽화 고분은 동한에서 조위시기까지의 고분들로 특히 묘주도나 생활풍속도 면에서 고구려 초기 고분과 친근한 인연을 보여준다.
반면, 4~5세기에 중국의 한과 위진 고분 미술과 교류한 벽화 전통을 이미 수립한 고구려는 500년 전후시기에 와서는 정밀하고 장식적인 바탕과 휘날리는 듯한 천장 벽화와 함께 뛰어난 사신도 벽화를 단일한 소재로 표현하게 되었다.
중국 고분 미술 전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벽화는 고구려가 당에 의해 668년 갑자기 멸망당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비록 고구려가 벽화 고분을 짓기 시작한 것은 한대 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발달에 있어서 고구려는 같은 이민족인 선비족 등이 지배한 위진 남북조 시기의 생활풍속도적 취향을 강하게 반영해 창조적인 벽화를 많이 남겼다.
이처럼 고구려 고분벽화는 건축구조와 벽화의 주제 면에서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독자적이고 고유한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어서 한, 위진, 남북조의 중요한 중국 고분 벽화와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 고구려산성과 중국의 산성(2) >

고구려는 한때 동아시아 제일의 강대국이었으며,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 세계질서의 중심 속에 서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고 일컬어 질 만큼 한반도를 포함한 중국 동북 등의 드넓은 곳에 후연, 거란, 동부여 등의 유물, 유적들과 차이가 많은 성터들과 성벽들을 남겼다.
여호규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고구려 성의 특징은 주변국들과 맞서기 위해 견고한 돌 등을 이용한 독창적인 축조를 뽐내고 있어 겉모양부터 중국 성곽과 다르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평지에 황토를 층층이 다져 성곽을 쌓아 네모꼴 토성이 중국 성곽의 기본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나 단단하지 않아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고구려인들은 평상시에 들판에서 농사를 짓다가 외부의 침입을 받으면 험준한 산으로 대피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을 쌓아 국가체제의 근간을 이루면서 생존의 필수시설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각 지역에 돌무지무덤을 만들며 터득한 돌 다루는 솜씨를 활용해 산에다 석성을 쌓았는데 이는 고구려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전략전술의 요구에 따라 높낮이와 공간을 언제든지 조절할 수 있었다.
즉,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성 돌 사이의 구멍으로 화살을 날리는가 하면 부녀자와 노인 및 어린 아이들까지 합세해 윗부분의 돌을 밀어 떨어뜨려 접근한 적에게 치명타를 입히기도 했다.
퇴물림쌓기, 수평 쌓기, 바위 등 자연을 그대로 살린 축성법 등의 축성술은 고구려 석공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건국할 무렵, 고구려인들은 군사방어와 지역 거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지형, 곧 평지에 인접해 있으면서 넓은 골짜기를 감싼 산에 성을 축조했는데 안시성, 건안성, 신성 등이 모두 이러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성 주변 지역과 쉽게 왕래할 수 있고 내부에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또한 적군의 침입지역과 경로가 어떻고 수도의 위치가 어딘가에 따라서, 그리고 수도와 국경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를 가늠해 성곽의 방위 각도를 달리 잡았다.
전쟁에 대비한 방어체계도 두개 이상의 성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구축했다. 도성의 경우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하는 평지성과 산성의 방어체계를 동시에 만들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어떠한 전투에도 대비케 했다.
이는 국내성과 환도산성,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거쳐 평지성과 산성을 합친 현재의 평양 시가지인 장안성으로 이어져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국경에서 도성에 이르는 구간의 경우 초기에는 국내성 주변에 동심원 모양의 외곽방어선을 구축하고 그 바깥에는 하천 연안로를 따라 종심방어선을 형성했는데 이 또한 수많은 적들이 여러 갈래로 밀고 들어와도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평양 천도 이후에 랴오허~평양성 구간에 방어선을 겹겹이 쌓은 것도 적들이 쉽게 정탐할 수 없게 하였고 한쪽 성이 무너져도 적들의 동향을 다른 위치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요새화 한 것이다.
특히 서북방 국경선에는 대평원에서 각 지류로 진입하는 골목마다 성을 축조해 남북으로 기다랗게 방어선을 구축한 것도 침략자들의 진입 속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다.
고구려는 552년부터 586년까지 35년간에 걸쳐 평양에 대규모의 새 수도성을 건설하였다.
고구려가 새 수도성을 건설하게 된 것은 대성산의 평양성이 강대한 성을 자랑하는 고구려 국가의 수도로서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어시설인 산성이 비록 가깝게 있기는 하였지만 분리되어 있는 것은 도시방어에서 결함이었다.
도시와 방어시설이 분리되어 있는 조건에서는 만약 수도에서 침략군과의 전투가 벌어질 경우 그 굉장한 궁성을 비롯하여 도시에 있는 모든 시설물을 적들에게 내맡기고 국왕과 대신 이하의 관리들, 군사들뿐만 아니라 수도 주민들이 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에도 도시를 파괴, 소각당하고 황폐화 시키는 참상을 면할 수 없었다.
새로 건설된 평양성은 도시를 전부 성벽으로 둘러막은 규모가 큰 공사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여 그 방어력을 강화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린 성이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취약점을 동시에 받아들여 살린 새 유형의 성으로 그야말로 금성철벽의 요새였으며 수도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보장해 주었다.
성벽은 모두 방어에 유리한 고지와 강기슭을 따라 쌓았는데 금수산 모란봉으로부터 시작하여 청류벽을 거쳐 대동강의 북쪽 기슭을 따라 평천구역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보통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뻗어 안산, 만수대를 거쳐 을밀대를 지나 모란봉에 잇닿아 있는데 그 평면구도가 표주박 모양처럼 생겼다.
평양성의 성벽을 고지의 능선이 아니면 강기슭을 따라 쌓은 것은 방어 전투에 유리한 고지와 강을 충분히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양성 성벽의 총길이는 23km이고 대동강과 보통강은 성으로의 접근을 막아주었으며 성안의 높은 곳은 망루 등으로 이용되었다.
평양성의 지형을 이렇게 선정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오랜 기간 산성을 쌓은 경험을 수도성 건설에 살린 것이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나 고려의 수도 개경 및 이조시기의 한성은 다 평양성을 계승하여 건설된 것으로 각지의 주요 읍성들을 건설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고구려인들은 멸망하는 그날까지 돌 하나하나에 생존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담아 온 국력을 기울여 성을 쌓고 또 쌓으며 그물망을 형성해 놓았다.
이러한 고구려 축성술은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까지 면면히 이어지면서 선조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군사시설이자, 선조의 지혜를 담은 문화유산이 돼 현재 우리민족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 고구려공예품과 중국의 공예품(3) >

고구려 공예의 특색은 전반적으로 보아 힘찬 기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균형이 잘 잡히고 아름다운 것이다.
고구려의 공예품으로는 불상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데 금동불로는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면에서 발견된 연가7년명금동일광삼존상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539년에 제작된 이 불상은 가늘고 긴 얼굴과 신체, 몸 좌우로 힘차게 퍼진 두터운 옷자락 등에서 중국 북위 양식의 영향이 보이지만 중국 불상에 비해 단순화되고 연꽃의 양감이 강조되는 등 한국적인 조형미가 함께 표현되어 있다.
불상의 아래 부분에서는 세 겹의 연꽃을 두른 둥근 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불꽃무늬의 광배를 지고 서 있는 세 부처로 이루어졌다.
가운데 부처의 부푼 듯한 두 눈과 오뚝한 콧날, 입에 미소를 머금은 긴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양 어깨를 두껍게 감싸 내린 옷은 겹겹이 주름을 새기면서 양 옆으로 지느러미처럼 뻗쳐 아래로 내려갔다.
불상은 속은 비어 있는 상태에서 내부에 철심을 세웠고, 불신과 광배, 받침대를 따로 주조하여 조립하였다.
본존불의 갸름한 얼굴과 밖으로 보이게 한 넓은 손바닥, 가슴 아래에서 양 옆으로 뻗어 내린 옷자락과 그 사이에 생긴 옷 주름 등은 이 시기 거의 모든 삼존불들에서 보이는 공통된 형상적인 수법이다.
또한 1937년 평양 서북쪽 원오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흙부처는 인자하고 친숙한 불상으로 주목을 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17cm의 이 작은 조소 불상은 온화하고 둥근 얼굴에 간결하게 정리된 옷자락을 늘어뜨린 채 연꽃 받침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귀엽고 천진하다.
이 부처들은 고대 풍을 띠고 있으면서도 미소를 지은 둥근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 곱게 주름진 옷 등이 모두 부드럽고 우아하며 입체감이 잘 나타나게 만들어졌다.
비록 얼마 크지 않은 흙부처이기는 하지만 표정과 자세를 잘 묘사한 조각품으로서 고구려 조각예술의 발전 면모를 보여준다.
이 부처들과 똑같은 부처 거푸집이 평양시 낙랑구역 낙랑동에서 나온 사실은 당시 이 지방에서 틀 빼기 수법으로 이러한 작은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구심점이 필요했던 고구려의 지도층들은 불교를 장려하였고, 이것이 점차 민간의 종교로 자리 잡아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불교의 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이러한 소망을 무덤벽화에 연꽃 그림으로 마음껏 표현하게 됐다.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 공작은 남북통일 후를 대비한 것(4) >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 공작으로 한-중 간 역사전쟁이 불을 뿜고 있다.
중국이 억지를 쓰면서까지 고구려를 자기들 역사 속에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은 ‘동북변강 역사 및 현상계열 연구공정’이라는 사업의 약칭이다.
그 주체는 국경과 영토문제 및 소수민족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에 설치한 ‘변강사지연구중심(邊彊史地硏究中心)’으로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수반되고 있다.
동북공정의 궁극목적은 한마디로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중국 동북부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있다고 정영훈 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치학)는 주장한다.
이는 순수 학술적 연구가 아니라 국가의 장기적 안정과 통일을 기하기 위한 사업이며, 민족단결과 변강의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업은 동북지역이라는 지역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공식적 민족관인 통일적 다민족국가관에 입각하여 전 세계에 중화적 세계관을 확산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연구대상은 고구려 문제에 국한되지 않으며, 간도문제나 중-러 국경문제 등과 같은 근대와 현대사 쪽 주제가 더 많다.
당연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프로젝트로 중국은 동북지방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멀리는 남북한의 통일에 대비하자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문제는 중국이 동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고구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궁극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맞설 경우 통일한국이 간도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함이라고 서 회장은 주장한다.
게다가 한반도 유사시 군사작전권 등의 명분을 북한으로부터 찾기 위함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동북공정의 고구려 관련 연구물들은 고구려는 출발부터 중국 땅 안에서 시작하여 중앙정부와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해온 지방정권으로 격하시키고 있으며 고구려의 중심민족은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으로 규정, 우리민족과의 연결 고리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 또한 국가간 전쟁이 아니라 중국내부의 내전이자 통일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중국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고구려 역사도 그들의 일부라 강변하는데, 대동강유역은 본래 한사군의 땅이라는 주장도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를 우리민족과 분리하려는 의도로 고구려와 고려는 별개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내놓고 있으며, 고려는 고구려 아닌 한반도 남쪽의 삼한을 계승하고 있다는 억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경우 대동강 등 북측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여 한반도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도 내보이고 있다.
중국이 한국사와 한민족 관련 연구 주제를 대거 설정하고 있는 것은 조선족문제가 가지는 특수성이 고려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족이 통일된 남북한과 손잡고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할 경우 동북을 불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의 민족운동을 자극하게 된다면 중국으로서는 우려스런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중국정부는 지난해 초부터 조선족들에게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이고, 조선족은 중국이라는 대가정의 한 가족으로서의 중화민족이며,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요지의 역사관․민족관․조국관 등의 ‘삼관교육(三觀敎育)’을 학생들에게까지 강조하고 있다.
그야말로 중국 공산당은 조선족의 민족부활 고삐를 바짝 죄이기 위해 위성안테나를 이용한 한국 방송 등을 시청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한족 등을 내세워 조선족 집에 숨어 지내는 북한 이탈 주민들을 신고하게 하는 등의 갈등도 조직적으로 부추겼다.
이는 조선족의 동태를 민감할 정도로 경계하고 있는 중국 중앙의 동북공정의 뚜렷한 목표와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한․중․일간의 역사전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개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쟁에서 한국의 권리를 얼마만큼 확보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미래와 직결되며 개개인도 그에 크게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동아시아의 미래와 관련하여 자기들이 권리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역사 자산들을 확보해 한반도의 연고권을 과거처럼 또다시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조만간 우리민족 문화의 독자성을 거부하고 중국의 아류이자 종속물처럼 만들기 위한 작업을 마치고 때만을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민을 책임지는 국가라면 이 같은 역사 전쟁에서 자민족이 부당한 피해자가 되지 않게 하기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시민사회의 압력에 밀려 고구려연구재단을 출범시키는데 만족하지 말고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형성해 가는 중심축에 서 있어야 중국 동북공정이라는 ‘만리장성’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 고구려의 눈으로 고구려를 보아야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은 국제적이되 고유하며, 진취적이되 포용적이며, 철학적이되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되 창의적인 것으로 중국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고구려의 문화는 흔히 ‘개방적이면서 개성이 강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내륙아시아나 중국의 문화와 다르고 백제나 신라와도 차별화 되면서 삼국을 하나로 묶는 독창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공존했던 고구려의 사회적 성격이 고구려의 독특한 미감을 형성하였고 이것이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문화는 지금까지도 우리 문화의 커다란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은 창조되거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돼 주변국들에게 전파됐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입증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유네스코(UNESCO)에 등재하려는 목적은 동북3성이 역사와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확인한다는데 있다.
고구려 역사를 둘러싸고 중국과 우리가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은 고구려의 눈으로 고구려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산성의 경우 중국의 네모꼴 토성과는 달리 돌로 튼튼하게 쌓았으며 무덤 또한 단조롭고 밋밋하지가 않고 돌각담무덤, 돌기단무덤, 돌칸흙무덤 등 다양한 종류의 웅장한 무덤들을 축성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벽화는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힘 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한국화와 고유한 필치로 당시 고구려인들의 생활풍습 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고구려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과정

1998년 11월: 북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가입.
2000년: 북한, 고구려 유적 잠정목록을 제출.
2001년: 북한, 무덤떼를 세계유산으로 신청 후 현지실사 받음.
: 중국,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도 함께 등록할 것을
북한측에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절.
2002년: 중국, 부랴부랴 고구려 왕성과 왕릉 및 귀족무덤 등을
잠정목록으로 제출.
2003년: 중국, 국가적 사업으로 총력을 기울여 고구려 유적 정비.
2004년 5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평가결과 공개.
2004년 6월 28~30일: 중국 쑤저우에서 열리는 제28차 총회에서 북한과
중국 두 나라 고구려 유적의 등재가 결정됨.

(세계일보 / 남창룡 기자 2004-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