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 "새로운 삶의 운동 시작하다"

“중국에 안지려면 한국전통 되살린 ‘생명학’ 세워야”
“다툼없이 양보했던 예맥과 숙신의 우리문화에 전인류 원하는것 있어”

어떤 어려운 시절에도 삶을 뜨겁게 노래해왔던 시인 김지하(金芝河·63)가 이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삶의 운동을 시작한다. 사단법인 ‘생명과 평화의 길’ 창립을 제안한 그는 오는 8월 하순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함께 발기인대회를 연다. 권위주의 체제의 엄혹한 압제와 감시 속에서 담시 ‘오적(五賊)’으로 썩은 세상을 일갈했던 김지하는 수없는 투옥을 경험했고 1980년대초 형집행정지로 출감한 직후부터 생명운동·환경운동에 매달려왔다.

그 20여 년은 “테러, 전쟁, 세계경제 위기, 도덕적 황폐, 지구생태계의 전면적 오염 같은 인류적 대혼돈의 시대를 극복하고 참다운 생명과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는 길”을 모색하는 긴 여정이었다. 이제 생명평화 운동의 이론정립과 실천방안을 위해 조직적 대안이 절실하다고 보고 첫 걸음을 내딛는 그를 14일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만났다.

-’생명, 평화, 길’이라는 세 단어는 모두 알겠는데, 그것들이 합해진 말은 쉽지 않습니다. 중학생이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랫가사처럼 쉽게 좀 말씀해주십시오.

“요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살아있는 목숨들이 다 문제다라는 겁니다. 지구 생태계는 전부 문제지요. 또하나는 이라크 전쟁을 보듯 평화도 없습니다. 지구와 우주 사이에도 평화가 깨졌습니다. ‘생명’이 자신의 문제라면, ‘평화’는 생명과 생명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우리에게서 열릴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예맥과 숙신은 삶을 좋아하고 죽이지 않으며, 양보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죽지않는 군자의 나라다’라고 했습니다. 예맥과 숙신 모두 우리 조상을 일컫습니다. 우리 민족 전통 안에 전 인류와 지구가 원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제 뜻은, 다음 문명이 그런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맥과 숙신을 얘기하는 산해경에서 2004년 오늘날까지는 가랑이가 찢어질만큼 시대를 뛰어 넘지 않습니까? 먼 조상의 이야기를 지금 당대의 해결책으로 끌어오는 것은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닙니까?

“우리 사상의 원류라고 하는 천부경, 최치원이 말한 풍류, 동아시아에 내려오는 유불선, 노장학, 불교의 화엄경, 법화경 등에 다 들어 있는 생명이요 평화지요. 천부경에 나오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즉 음양, 주야, 일월 같은 모든 대립되는 것들이 사람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다는 사상이 최수운의 동학에 와서 다시 부활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요구와 과제를 세워놓고 첫째, 생명학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둘째, 생명학에 토대를 둔 평화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를 따져보자는 게지요.”

신도시의 아파트와 호수 공원이 내다보이는 김시인의 거실에는 곳곳에 책이 쌓여있었다. 그는 “좌골신경통 때문에 아침 일찍 여의도에 있는 병원으로 뜸 뜨러 다닌다”면서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아내 김영주씨와 얼마전 일본 여행도 다녀왔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술도 완전히 끊었다는 그에게 지금 한국의 과제를 물었다.

-한국은 지난 30년간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지금 사회적으로 많은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중국과는 고구려를 놓고 역사 분쟁이 일 소지도 있고, 미국과의 전통적 동맹관계도 내부 개혁의 거센 도전 속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중국은 지금 대대적으로 문화적 애국주의 깃발을 올리고 있습니다.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이 열립니다. 그 2년 뒤엔 상하이 엑스포가 있지요. 공산국가인 그들이 지금 초·중학생들에게 사서삼경을 암송시키고 있습니다. 올림픽이나 엑스포 때 중국 청년 누구나 중국 고전을 줄줄 외는 수준으로 문화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동북공정은 말할 것도 없고…중국은 자신들의 과학기술과 생산력을 전 세계에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중국이 문화적 자부심을 들고 나올 때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고대를 보면서 먼저 나가자는 것입니다.”

-유신체제 하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 까지 받았던 시인께서 정치색을 다 빼고 생명운동을 하겠다고 하는데 주변의 반발은 없습니까?

“20여년 전 내가 감옥에서 나와 생태와 환경의 중요성을 얘기하자 나를 미친놈, 변절자 취급했지요. 하지만 나는 원주에 있을 때 찾아온 후배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병정놀음을 하느냐, 전쟁을 하느냐. 우리는 단기 중기 장기 목표를 가져야 해요. 단기는 독재타도, 중기는 근대사와 동학 공부, 장기는 동·서학의 통합과 우주관의 탐험이지요. 그게 없으면 금세 담론 부재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은 지금 무엇을 걱정해야합니까.

“새로운 문명에 대한 견해를 세우지 못하면 우리나라 통일 못합니다. 문명론을 세우고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통일은 한참 걸릴 것입니다. 남북이 동북아 허브, 특구 설정 같은 경제적 비전을 공유하면서 큰 얘기를 밀고 나가야 작은 얘기도 해결됩니다. 나는 한국이 지금 문명의 중심, 문명의 교차로 노릇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시인으로서 생명학을 일종의 해석학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공감대를 넓혀가야 할텐데요.

“루 살로메는 릴케의 애인이었지만, 니체도 그녀에게 반했지요. 그러나 살로메는 니체를 미친놈 취급했습니다. 얘기를 들으면 멋 있는데, 늘 희랍 신들을 얘기하거든요. 한국에서 김지하 처지가 그렇습니다.”

◆ 시인 金芝河는

김지하는 ‘1960년대와 70년대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두산백과사전)이다. 그는 전남 목포의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원주중학교 재학 중에는 지학순 주교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서울대 미학과 학생으로 4·19를 맞았으며,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오적’을 발표하면서 단숨에 저항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1984년 사면 복권 이후 사상적인 발전을 보이면서 1998년 율려학회를 발족해 새로운 형태의 민족문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복역 중이던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다.

(조선일보 2004-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