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역사현장을가다](中) 중국 지안시 박물관의 역사왜곡 현장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사의 일부로 편입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지린성 지안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유적에는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숨결이 그대로 배어 있는 듯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막대한 돈을 투입해 지난 2일 재개장한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 박물관이 ‘고구려가 중국 고대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고 있는 역사 왜곡의 현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는 중국 학계의 일부 목소리가 아니라 중국 정부가 직접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지안시 박물관 소속 안내원은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박물관 정문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 적힌 대로 “고구려는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의 하나”임을 강조했다. 이 안내원은 “고구려는 동북아지역의 고대문명국가”라면서도 “고구려 역사는 중국의 고대사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지안의 한 소식통은 “중국은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하면서 민족(중국이 일컫는 ‘고구려족’)은 완전 소멸됐다고 보고 있으며 남한은 신라의 후손, 북한은 백제의 후손으로 각각 이해하고 있다”며 “중국의 조선족은 이씨조선 시대 중국으로 넘어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안의 고구려 유적들에 배치된 안내원들도 관람객들에게 유적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고구려와 고대 중국의 밀접한 관계를 집중적으로 강조,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안시 박물관에는 고구려 유물 발굴과정에서 나온 중국의 삼국시대와 남북조 당시 사용한 화폐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또 중국측 인사들은 고구려 벽화에 중국의 신화와 전설이 많이 담겨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찬란한 고구려 벽화를 가득 담고 있는 오호분 제4호묘의 관람실에 전시된 씨름 벽화를 설명하면서 관람실 직원은 “일본 쓰모(씨름)의 모태”라고 하면서도 ‘한국의 씨름’이라는 부문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벽화에 나오는 청룡·백호·주작·현무는 중국 고대 도교사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안시 박물관은 지난해 중앙정부가 지원한 예산 8천만위안(1백20억원)을 투입, 대대적인 내부수리를 단행한 뒤 외부인의 참관을 일절 통제해오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직후 전격 개방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8일 오후, 고구려 유적이 많기로 소문난 지안시 박물관을 찾았다. 1959년 개관, 중국의 저명 학자 곽말약(郭沫若)의 유려한 필체가 돋보이는 정문을 지나 들어선 아담한 단층 건물의 박물관은 그러나 재개관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관람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박물관은 전체 소장 고구려 유물 1만4천여점 가운데 추려낸 355점의 유물을 8개의 전문 구역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유물은 광개토대왕릉인 태왕릉에서 지난해 발굴한 청동 방울. 길이 6㎝ 남짓한 청동 방울에는 ‘신묘년에 광개토대왕이 방울 96개를 만들었다(辛卯年好太王×(판독불능 1글자)造鈴九十六)’이라는 12글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또 태왕릉에서 발굴된 황금 제상(다리만 4개 남은 것)과 ‘원컨대 태왕의 무덤이 뫼처럼 안전하고 큰 산처럼 견고하기를(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11글자가 적힌 기왓장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한결같이 고구려가 중국 고대 지방정권의 하나이며 중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4귀가 달린 큰 토기 등은 분명 고구려만의 독특한 문화를 한눈에 설명해주는 증거였다. 중국의 토기에는 귀가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찬란한 고구려 말기 벽화를 담고 있는 오회분(뚝배기 모양의 묘 5개가 일자로 이어져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의 네번째에 있다고 해서 4호묘로 이름붙인 곳에는 청룡·백호·현무 벽화(다만 주작 벽화가 있는 남쪽 벽은 폐쇄회로 장치가 되어 있어 관람 불가)를 관람실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화면에 나타난 벽화는 1,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예전에 학교 교과서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이게 진짜 벽화 모습이냐”고 묻자 벽화 관람실 관계자는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같이 내려가보자”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관람실 관계자는 “벽화에 사용한 염료에 대해 현재 연구를 하고 있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나다”고 감탄했다.

관람실 관계자가 관람실에 걸려 있는 8장의 고구려 벽화 사진을 설명하면서 중국의 여자 조상인 ‘여와’가 나온다고 주장했지만 ‘여와’는 정작 저고리 비슷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이튿날인 9일 오후, 다시 박물관을 찾아가자 직원들은 “왜 또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구석에 서서 고구려 유물을 살피고 있는 기자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고구려에 대해 생소한 중국 관람객들에게는 고구려와 고대 중국의 긴밀한 관계를 열심히 ‘강의’하고 있었다. 지안은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자축하기 위해 고구려 유적을 다시 개방했지만 한국인이라면 일단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창춘(長春)에서 동행했던 택시 운전기사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말로만 막연하게 들었다”며 “정말 위대한 문화 유산을 가졌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경향신문 2004-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