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연구자들 중국 현장 답사해야

한국 현대소설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한국현대소설학회'회원들이 중국기행을 다녀왔다. 우리 일행은 6월 마지막 주, 7박8일간의 여정으로 이른바 실크로드로 불리는 시안-난저우-투루판-자위관-둔황-우루무치 일대를 답사했다. 참가자는 정년을 마감한 원로 선생님들부터 이제 갓 학자의 길에 들어선 20대 중반의 박사과정 학생을 망라했다. 또 한국인들에게 비의에 가득 찬 신비스러운 상상력의 극한으로 '둔황 바람'을 몰고 온 소설가 윤후명 선생이 동행했다.

서역기행은 베이징과 상하이 일대 테마여행과는 분명 달랐다. 우리는 황허의 발원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황허를 알 수 있었다. 황허는 시뻘겋고, 퍼렇고, 하얗게 빛났다. 한편으로 중원의 대륙은 느리고 추한 듯 보였지만 크고 넓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속도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찍이 유홍준 선생이 우리 국토 전역이 온통 박물관이라고 천명했지만 중국의 그것은 종합박물관 격이었다. 모래바람이 이는 자갈의 고비사막엔 국도가 증설되고 물길을 여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12억을 능가하는 인구에 걸맞게 볼거리도 다양했다. 가상의 진시황릉과 실제 병마용,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마오쩌둥의 현란한 글씨, 글자 박물관인 비림(碑林), 인류의 불가사의인 둔황 막고굴, 불국정토를 한 시대의 이상으로 여겼던 병령사 석굴, 모래바람이 부딪치는 소리에 의해 억겁의 풍화가 빚어낸 명사산, 그 아래 눈썹모양을 하고 홀연히 누워 있는 월아샘은 가위 일품이었다.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우리 일행은 때로 아연 긴장했고 때론 경악했다. 중국의 주요 문화재들이 근대의 서세동점으로 인해, 혹은 이념의 덫에 걸려 약탈이 자행된 형국을 목도하면서는 마치 우리 일인 양 분개했다. 프랑스에서 반환되지 않은 우리의 문화재를 상기하며 일말의 동병상련을 가졌다.

한편으로 우리는 둔황 막고굴과 인근 박물관에서, 난저우의 박물관에서 신라와 고구려.발해사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었다. 전문적 식견이 아니라도 그곳 박물관에 소장된 중화전도엔 고구려가 일개 변방 소수민족의 국가가 아닌 어엿한 자주국가임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근대의 뒤켠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이미 뒤틀린 경험을 갖고 있는 중국이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폄하하고 있다. 시대와 상황이 비약적으로 바뀌다보니 착종을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근대라는 무소불위에 농락당한 경험을 애써 외면하는 것인가. 흔히 '만만디'(慢慢的)와 '차부둬'(差不多)로 지칭되는 그들의 엠블럼을 표나게 내세우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왜 '고구려사 왜곡'이라는 진부한 과제를 시시때때로 새로운 과제인 양 꺼내는 것일까. 백번 양보해 저간의 행태가 보편타당성을 가지려면 우선 그들은 중국 내 모든 박물관의 고대사 관련 지도를 수정, 개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우리의 연구자들도 시야를 확대하고 보폭을 재촉해야 할 시점이다. 우루무치의 고창고성 벽화에 그려진 벽화가 고구려의 그것과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 막고굴 좌후편 그림이 왜 신라왕자인지, 왕자는 왜 중국행을 감행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부단한 발품과 손품에서 비롯될 것이다. 소설가 윤후명 선생은 "학자들도 작가 못지않게 많이 다니고 많이 봐야 한다"고 첨언한다. 무더위와 기나긴 장마의 습도에 지친 성하의 연구실에서 원고지와 씨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뒤틀린 문제의 현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일 역시 시급을 요한다.

<한강희 남도대학 관광정보과 조교수>

(중앙일보 200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