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間島)

안수길(安壽吉)이 남긴 대하소설 ‘북간도’는 1870년부터 8·15 해방까지 북간도(北間島) 전역을 무대로 한 가족 4대의 수난과 항일독립투쟁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안수길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지만 오늘날 흔히 ‘연변’이라 부르는 간도(間島)에서 성장,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해 누구보다 간도의 역사에 밝았다. 그런 까닭에 ‘북간도’는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도 높지만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소설로 풀어놓은 역사적 기록물로도 소중하다.

실제로 1870년은 함경도 대기근을 계기로 조선인의 간도 이주가 본격화된 시기이다. 조선인의 정착이 이어지자 이곳에 자국민의 이주를 금하고 있던 청나라도 청인의 이주를 장려하더니, 1883년에는 조선인의 철수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조선은 ‘백두산정계비’에 국경으로 기록된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해란강)을 가리키므로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했으나, 청나라는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우겨 국경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만주를 침략한 일제가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청나라 편을 들면서 체결한 것이 청일 간의 간도협약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는다고 명문화한 간도협약은 제3자인 일제가 맺은 협약이므로 당연히 무효일 수밖에 없다. 간도는 옥저와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이후 발해가 건국했던 우리 땅으로 지금도 우리 동포들이 자치주를 운영하면서 뿌리를 잇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네 변방 역사로 조작하기 위한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집요하게 추진하는 가운데 간도 땅이 18∼19세기까지도 우리 땅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지도가 공개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구려 유적이 중국과 평양에 집중 분포돼 있다 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될 수도 없거니와 북한만의 관심사로 내버려 둘 사안도 아니다.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정부와 학계가 더욱 노력해야 하겠다.

(세계일보/김국수 논설위원 200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