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쪽은 한국사 주무대였다"

만주 집안시 국내성 부근에 있는 각저총의 씨름 벽화. 이 지역이 한반도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준다.

"중국 산둥반도, 서부의 허베이성 일대, 북부의 랴오닝성 지방, 북동부의 랴오 둥반도와 동부의 지린성, 여기에 한반도까지 포함한 지역이 한국 역사의 주무대였다."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선문대 이형구 교수(60)는 '한국고대문화의 비밀'(김 영사 펴냄)이라는 책에서 중국 동쪽지역이 우리 역사의 중심지였다고 지적한다 . 이쪽 지역이 특정 시기에만 우리의 힘이 닿았던 곳이 아니라 이미 석기시대 부터 한반도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는 것.

저자가 이 같은 주장을 펴는 데는 근거가 있다. 구석기시대 문화 흔적에서 우리 문화와의 동질성이 곳곳에서 확인되는 데다 특히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는 빗살무늬토기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문화를 기반으로 성립한 정치조직이 바로 고조선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우리 고대문화의 원류를 시베리아로 생각하고 있는 일반적인 정서에 반박하는 것으로 눈길을 끈다.

저자는 특히 이 같은 발해연안(渤海沿岸)문명이 황허 중상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중원문화'와도 뚜렷이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오히려 연대가 흐르면서 중원문화가 발해연안 문명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한 가지 예로 고구려의 안학궁은 당나라의 대명궁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즉 당시 고구려가 당나라보다 강한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이었다는 방증인 셈이다. 또 중국 동북부에서 발견되는 산성의 대부분은 고구려 고유의 산성축조 기술인 포곡식(包谷式)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당시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의 왕릉, 궁성 유적에도 고구려의 영향은 드러난다. 이 교수는 원인을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이 당나라에 유입되면서 문화선진국이던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고구려 문화가 한국 역사 전체의 중심문명이었음을 강조한다 . 부여 고구려 백제가 비슷한 의복을 입고, 비슷한 음식에 비슷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백제토기와 신라의 황금장식도 고구려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는 것.

최근 벌어지는 고구려 역사논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매일경제 200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