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 주권

고구려가 첫 번째 수도인 졸본에서 국내성(현재의 지안·集安)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간 사건이 한 계기가 됐다. ‘삼국사기’에 보면 서기 2년 설지라는 신하가 왕에게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신이 돼지를 쫓아 이르렀던 땅은 오곡을 심기 좋으며 산짐승, 수산물이 많습니다. 강과 산이 매우 깊고 험난해 전쟁의 재난을 면할 수 있습니다.”(서길수,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 졸본에서 국내성까지의 거리는 170㎞. 실제로 돼지가 이 정도의 주행능력을 발휘했으리라 믿기는 어렵다.

▶어쨌든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고, 광개토대왕, 장수왕대에 이르기까지 동북아를 호령하는 대륙왕국으로서 황금기를 누렸다. 지안은 지금도 도시 전체가 고구려 박물관 같은 곳이다.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국내성 환도성터, 그리고 ‘5~7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문화적 성취’로 평가되는 고분벽화들…. 중국 정부는 거의 돌보는 이 없던 이 유적들을 ‘동북공정’이란 이름 아래 막대한 예산을 투입, 정비하더니 엊그제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시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현재 129개국 754곳이 목록에 올라 있다. 우리나라는 석굴암·불국사·고인돌·훈민정음 등 13건이다. 세계유산 등록 과정에서 민감한 문제가 이른바 ‘역사 주권’과 ‘영토 주권’이 불일치하는 경우다. 유네스코는 어느 민족이 창조한 것이라도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면 공동으로 지켜야 한다는 정신 아래, 현 영토 소유 국가가 등록할 수 있게 했다. 1984년 스페인의 회교 문화유산인 코르도바를 등록한 것이나, 이번에 중국 지안의 고구려 유적을 올린 것도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세계유산 등록이 결정되자마자 중국은 관영 인민일보와 신화사 통신을 앞세워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부”라고 선전하며 고구려에 대한 역사 주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금 그 문화재가 자기 영토 안에 있다 해서 거기 담긴 혼과 역사마저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동네 어깨 수준의 자세다. 그런 그들이 강릉 단오제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걸작’에 등록시키려 한다는 소식에 ‘문화 약탈’이라고 펄쩍 뛰었던 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 청천강을 건너겠느냐/ 이 세상에는 건너야 될 강이 있고/ 건너서는 안되는 강이 있나니/…/ 자 신호 따라 막았던 둑을 허물어라/ 거센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마라 우문술아 우중문아/…”(문충성, ‘을지문덕’) 을지문덕 장군의 기개와 지혜가 생각나는 시점이다.

(조선일보 200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