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 컴플렉스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
북한 대표단 이의하 단장 눈시울 적셔

지난주엔 물의 도시 쑤저우에 다녀왔습니다. 인구 600만이 채 안 되는 장쑤성의 작은 도시인 쑤저우는 ‘동방의 베니스’라 불릴 만큼 도심 한가운데에 하천이 많습니다.

쑤저우에 간 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의 취재 때문이었습니다. 제28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WHC) 회의가 2004년 6월28일부터 7월7일까지 열흘간의 회의 일정으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었죠. 이미 보도를 통해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이번 세계문화유산위원회 회의에서는 북한이 ‘고구려 고분군’이란 이름으로 등재 요청한 평양 일대의 유적과 중국이 ‘고구려의 수도와 왕릉, 그리고 귀족의 무덤들’이란 이름으로 등재 요청한 지린성, 랴오닝성 일대의 고구려 유적지들이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30번째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고, 북한은 처음으로 북한에 있는 문화재가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자리매김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한 1일 회의장 로비에서 만난 중국 대표단의 장바이 중국 국가문물국 부국장은 “중국의 고구려와 조선(북한)의 고구려가 함께 등재돼 매우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문물에 대한 연구과 전람을 위해선 우선 잘 보존하는 게 급선무이므로, 이를 위해 중국과 주변국들이 협력하자”고 말했습니다. 이어 커피 휴식시간 때 모습을 드러낸 이의하 북한 대표단 단장(북한 문물보존지도국 부국장)은 “고구려가 기원전 277년부터 668년까지 천년 동안 지속된 오래된 나라이며,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에서 크게 발달한 강국이었다”고 소감을 토로했습니다. 환갑 나이의 리 단장은 북한 사람 특유의 옹골찬 외모를 지녔지만, 회담장 안에서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이 등재되기로 결정되는 순간,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견디지 못해 눈가를 훔쳤다고 어떤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저는 이날 관련 기사를 국내로 송고하면서 이른바 ‘동북공정’과 관련한 논란은 일부러 쓰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의 문화재가 중국 땅에 있든 북한 땅에 있든 일단 ‘인류 문화 공동의 자산’으로 인정이 된 이상, 서로 협력해 아끼고 잘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중국쪽을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 <신화통신>, 고구려가 "역대 중국 왕조와 예속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 숙소에서 눈을 뜨자마자 버릇처럼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들어갔습니다. <신화통신>을 가장 먼저 뒤져보았습니다. 여기에 실린 기사를 보며 저는 중국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과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유적지가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배경자료’란 제목의 자료를 덧붙여 고구려와 고구려의 벽화, 광개토대왕비 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자료를 통해 <신화통신>은 고구려가 “역대 중국 왕조와 예속관계를 맺어왔으며, 중원왕조의 제약과 관할을 받은 지방정권”이었으며, “정치와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중원 왕조의 강렬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통신은 또 고구려가 “민족적 특색을 지닌 문화를 창조했으나, 중·후기에는 중원문화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다”며 “견고한 산성, 웅장한 능묘, 휘황찬란란 고분벽화는 화하(중국)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관영 <신화통신>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 최대의 통신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연합뉴스’나 서방의 에이피(AP), 유피아이(UPI), 로이터(Reuter), 아에프페(AFP) 등 민간 통신사와 달리 <신화통신>은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관영’ 통신사입니다. 중국 정부는 보도자료를 배포할 때 <신화통신>에 싣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중국 각 언론에 대한 <신화통신>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이런 언론에 “고구려는 중원정부와 예속관계에 있었다”는 보도가 났다는 건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중국 당국의 관점이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고구려는 중원의 제국에 맞서 고조선의 고토를 지킨 강대국

굳이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도 없이, 고구려는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 중원의 제국에 맞서 수백년을 투쟁하면서 고조선의 고토를 지킨 강대국입니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 줄곧 한나라와 투쟁하면서 고조선의 옛땅을 수복했고, 수문제와 수양제 부자(父子)의 네 차례에 걸친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고구려 침략으로 국력이 쇠잔한 수나라는 곧 멸망했습니다. 당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녕에 들어섰다가 고구려의 강력한 반격에 진열이 무너졌고 당태종은 화살에 맞아 눈을 한쪽 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든 역사가 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수서> <구당서> <신당서>에 나오는 얘기들입니다. 그런 나라가 “중원정부와 예속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보통 억지가 아닙니다. 물론 역사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전술적으로 항복을 하기도 하고 고구려 영양왕이 스스로를 “요동분토신(遼東糞土臣, 요동 땅에 있는 똥덩어리 신하)”이라고 낮춰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중원의 수나라 왕을 놀린 것이지 ‘예속관계’를 맺겠다는 게 아닙니다. 영양왕이 그 뒤로도 수나라와 맞서 투쟁을 계속한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우중문에게 “전쟁에서 이긴 공이 드높으니 족함을 알고 그치길 바라노라”고 한 것도 진정으로 그를 칭찬한 게 아니라 그를 놀린 것이었지요.

중국의 일부 중화주의자들은 또 고구려 벽화에 중국 신화의 내용이 실려 있음을 들어 고구려의 문화가 중국문화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논리를 중국에도 적용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킨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방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라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마오쩌둥 등 중국의 지도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중국화’했기 때문에 이런 논리는 옳지 않다고 반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남의 문화를 ‘중국화’할 수 있는데, 고구려라고 해서 중국 문화를 ‘고구려화’할 수 없다는 얘깁니까? 말이 안 되죠.

역사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속 좁은 태도는 '긁어부스럼' 만드는 일

고구려 문화에 대한 중국의 주장이 억지라는 건 여기서 더 논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다만 저는 중국의 중화주의자들이 너무 식견이 좁고 옹고집스럽고 패권주의적이라는 데 대해 크게 실망했습니다. 중국처럼 큰 나라라면 우리는 대체로 큰나라다운 호방함과 관용스러움을 갖출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구려 문제를 보면 중국은 전혀 그런 태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혹시 고구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중국이 그런 억지 주장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역사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속 좁은 태도는 문자 그대로 ‘긁어부스럼’을 만들 뿐입니다. 그로 인해 남북한 국민의 역사문제에 대한 경각심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것만이 세계 제일”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억지를 부리는 일도 할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만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억지 주장을 수수방관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수 특파원>

(한겨레신문 200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