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론] '고구려역사 싸움' 0 對 1

지난 주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에서 북한과 중국이 각각 요청한 고구려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개별 등재되었다. 북한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유산을 갖는 수확을 거두었지만 중국측의 성과와 비교해 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외형적인 규모에서 크게차이가 난다.

‘고구려 고분군’이란 이름으로 등재된 북한측 세계유산은 모두 5개 지역, 63기(벽화무덤 16기 포함)의 고분이다. 이것들은 물론 문화ㆍ예술ㆍ역사적 가치 등 실질적 내용면에서 빼어난 것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강서대묘를 비롯하여 쌍영총, 약수리무덤, 수산리무덤, 용강큰무덤의 벽화들이 등재되었다.

후기벽화를 대표하는 강서대묘의 사신상, 유연하고 신비한 현무도는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다. 수산리무덤의 벽화에 나온 주름치마입은 여인상은 일본 다카마쓰고분에 그려진 여인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거나 고구려 유민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한편 중국은 ‘고구려의 수도(졸본, 국내성, 평양)와 왕릉 및 귀족무덤’을 등재시켰다. 중국은 랴오닝성 환런현에 있는 졸본이 고구려의 첫 수도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1996년부터 이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와 발굴작업을 벌였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 일대에 대해서도 300호 이상의 민가를 철거하고 가능한 모든 성벽을 복원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발굴ㆍ정비작업을 했다.

또한 그들은 광개토태왕비 보존을 위해 사방을 방탄유리로 막아버렸을 정도다. 태왕비와 태왕릉 사이에도 400호 가까운 민가를 철거하고 그곳에서제사터를 발굴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앙당 차원에서 천문학적 자금을 들여 모두 1,000호에 가까운 민가를 철거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이 고구려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이번에 북한이 단순히 고분만을 등재시킨 것에 비해 중국은 고구려역사도시 전체 유적을 지역별로 구분해 등재시키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객관적인 잣대로 보더라도 중국측 유적이 규모면에서 월등히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마치 고구려의 수도와 중심지는 모두 중국 땅에 있고 북한에는 일부 무덤떼만 남아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중국은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 받기 위해 이번 회의에서 이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따라서 앞으로 북한은 후기 평양성을 비롯하여 안학궁, 대성산성 같은 왕성들과 정릉사, 중흥사, 광법사 같은 고구려 절터(중국은 단 하나의 절터도 발견하지 못했다)를 기준에 맞게 정비하여 추가로 등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런 유적들을 보존ㆍ복원하는데는 높은 기술과 많은 재정적 후원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에 남북한이 서로 협력하는 공조정신이 필요하다.이 공조과정에서 북한은 남쪽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성공적으로 고구려 후기도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고 남한의 학자들은 고구려의 유적과유물을 폭 넓게 연구하여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중국측과 대등하게 격상시키려면 차후에북한 내 왕경 유적을 전체로 묶어 다시 등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굴암과 불국사가 먼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데 이어 경주 도시 전체를다시 등재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 문제는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면밀한 대응이 요구된다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한국일보 200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