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대적하려면 영어대국 돼야” 베이징,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 수업

중국 베이징(北京)의 초등학교 2학년인 왕모(9)군은 학교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더 바쁘다. 오전에는 수학 과외를 4시간 동안 받은 뒤 오후에는 피아노 교습을 받는다. 중학교 입시(入試)가 있는 중국 초등학교에서는 어느 과목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는 평일에는 아침 7시30분까지 학교에 등교해서 오후 4시30분까지 빡빡한 수업을 소화해야 한다. 집에 와서는 다시 가정교사와 학과목을 복습하고 있다. 명문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며 고사리 손을 움직이고 있는 왕군은 오는 9월 새학기(중국의 학기는 9월에 시작해 이듬해 7월에 끝난다)에는 더 큰 부담을 안아야 한다. 영어 수업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베이징 시교위(市敎委)는 그동안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행하던 영어 수업을 새학기부터 전체 초등학생들로 확대ㆍ실시하기로 했다. 일부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영어 수업을 실험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이번 시교위 결정으로 전체 초등학생들이 영어 수업을 받게 됐다.

上海·靑島서도 1학년부터 영어수업

학교마다 사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초등학교는 하루에 1시간씩, 1주일에 5시간씩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학기당 300위안(약 4만5000원)을 내면 원어민 교사 수업도 1주일에 2시간씩 추가로 받는다. 또 토·일요일에는 빈 교사(校舍)를 활용해 오전 4시간 동안 영어 과외 수업을 하고 있다. 베이징 시교위는 초등학교 1·2학년의 경우 학교장 재량으로 수업 시간을 배정하도록 하되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숙제는 가능한한 내주지 말도록 일선 학교에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베이징 교육 당국이 조기 영어 교육에 신경을 쓰는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화 시대에 대비하자는 의도다. 물론 자녀들을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키우려는 학부모들의 열성도 한몫을 하고 있다.

물론 이보다 어린 유치원 학생들도 이미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있다. 여유가 있는 학생들이 몰리는 명문 유치원인 베이징 외국어대학 초등학교 부설 유치원은 2001년부터 1주일에 4시간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간단한 영어 인사법을 배우고 원어민의 발음이 담긴 테이프로 듣기 수업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영어 열풍은 수도인 베이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 등 대도시의 일부 명문 초등학교도 이미 1학년부터 영어 수업을 시작하고 있다.

6월 17일 오후 2시. 베이징에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영어 사설기관인 신둥팡(新東方)학교 본부를 찾았다. 5층짜리 건물의 1층 접수 창구에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수강 신청을 하려는 대학생들을 비롯해 100여명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들은 안내 책자를 훑어보면서 어느 과목을 수강 신청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접수 창구 옆에 있는 서점에는 학교 측이 펴낸 각종 영어 교재를 팔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가득 메운 서점에 초등학교 4~5학년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이 열심히 영어 동화 시리즈 책을 고르고 있었다. 가슴에 한아름 동화책을 안고 있으면서도 엄마와 함께 서가에 진열된 동화책을 또 고르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오후 4시쯤 학교를 나올 즈음에는 수업을 마친 듯한 대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993년 사설 학원으로 생겨난 신둥팡학교는 중국의 영어 열기 덕분에 불과 11년 만에 하나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2년에는 토플 만점자만 8명을 배출했을 정도다. 베이징을 비롯해 중국 전역의 10개 대도시에서 800여명의 강사가 토플, 영어회화반 등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강료는 10일 동안 600위안(9만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엄청나게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베이징의 경우 본부에서 영어 실력 시험을 치른 뒤 실력에 맞게 베이징의 각 구청별로 산재해 있는 분원(分院)을 지정, 수업을 받는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여름방학 때는 아예 기숙사 반을 운영한다. 10일 동안 보통 월급 생활자의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1200위안(18만원)이지만 늦게 가면 마감되기 일쑤다.

캠퍼스·학원 가서도 토플·회화 ‘붐’

대학 캠퍼스도 예외는 아니다. 아침마다 어슬렁거리며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영어 교재를 큰 소리로 읽고 있거나 이어폰으로 BBC 등 영어 방송이나 영어 회화 테이프를 듣고 있다. 이처럼 영어 공부에 대학생들이 열중하는 까닭은 대학 졸업장을 받으려면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중점대학의 경우, 대학영어시험 6급(고급 수준)에 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 학생들은 4급 시험(보통수준)을 통과해야만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1년에 2번 치르는 대학 영어시험은 대다수 학교들이 영어시험 성적이 70점을 넘지 못하면 아예 응시조차 할 수 없도록 규정, 학생들의 원성이 높다. 물론 대학 졸업생의 가장 큰 소망인 유학을 이루기 위해서도 영어 공부가 필수적이기는 하다. 베이징대학 경영대학은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아예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공무원들도 영어를 못하면 승진할 수 없다. 대사관이나 다국적 기업들의 본사가 몰려 베이징의 강남으로 불리는 차오양(朝陽)구는 공무원 영어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연말 근무 평점에서 ‘우수’를 받지 못하도록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2000명에 가까운 구청 공무원이 영어 공부에 땀을 흘려야 하는 이유다. 택시기사나 호텔 종업원 등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도 올림픽에 대비, 영어 공부에 힘을 쏟고 있다.

중국의 영어 열풍은 리양(李陽·36)이라는 스타를 배출하기도 했다. 무명 영어강사이던 그는 1990년대 중반 ‘미친 영어’ 교습 방법을 개발했다. “가능한한 큰 소리로, 가능한한 빨리, 가능한한 정확하게 발음하라”는 그의 영어 교수법에 중국 대륙이 열광하고 있다. 그는 요즘 TV 방송의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가 하면 중국 전역이나 한국 등을 돌아다니며 “영어란 결코 넘지 못할 장벽은 아니다”는 평소 지론을 전파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의 영어에 대한 관심 또한 엄청나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국가 부주석 시절 한국을 찾았을 때 주한 중국 대사관의 외교관들에게 “한국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어를 기본적으로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에 대한 중국 최고 지도부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5개 국어에 능통하다는 장쩌민(江澤民) 중앙군사위 주석도 국가주석 시절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창한 영어로 대답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장쩌민 주석은 5개 국어 ‘술술’

중국에 영어 열풍이 불게 된 계기는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었지만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려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열망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수퍼파워인 미국과 맞서기 위해서는 세계어인 영어를 정복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는 설명이다.

물론 중국의 조기 영어 교육 열풍에 대해 반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중국어 교사를 중심으로 조기 영어 교육이 중국어 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교사나 교재의 충분한 확보 없이 탁상 공론식 행정으로 영어에 대한 관심이 왜곡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중국 학교에 보낸 일부 한국인 학부모들은 영어 교사들의 자질이 문제라며 중국의 조기 교육이 과대 평가된 것이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다. 자질이 뛰어난 사범대 영어교육과 출신 교사를 초등학교에 초빙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상당수 학교에서는 원어민 교사를 통해 회화 수업을 진행시키거나 테이프로 대신하기도 한다. 대신 중국인 영어교사는 쓰기와 읽기 위주의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 교육에 대한 중국인들의 열의와 정성을 보면 언젠가 중국이 영어대국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더욱이 베이징대학이나 칭화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앞다퉈 미국이나 영국 등 외국 유학을 가고 있는 마당에 영어에 대한 이들의 관심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인들의 열망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경향신문 200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