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안보 시스템의 '체질'문제

외교안보 정책에 시대적 흐름이 더 중요할까, 아니면 구체적인 사실 하나하나가 더 중요할까? 물론 이러한 이분법적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세계 정치 질서의 격변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가 얼마나 외교안보에 중요한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모습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파스칼이 살았던 17세기의 유럽은 한 세기 동안 97년이나 전쟁이 계속되었던 국제 질서 재편의 시기였다. 그는 이러한 시기에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같이 얼핏 보기에 하찮은 사실이 엄청난 외교안보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제정치 분석가들은 파스칼의 이러한 주의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높든 낮든 간에 상관없이 세계 정치의 커다란 흐름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외교안보 사령탑도 이러한 사고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외교안보는 시대적 흐름이나 이념적 지향을 중시했지 미국이나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에는 별로 신경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외교안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 외교안보의 예견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이를 외교안보 팀의 역량 부족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지나치게 “동맹이냐 자주냐”와 같은 원칙론에만 매달려 온 우리 외교안보 시스템의 ‘체질’에 더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미국이나 일본의 외교관들이 한국 외교안보 시스템의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제기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워싱턴에서 만난 미국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한국 대사가 한국 시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미국에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며, 또 미국에서 일어나는 긴급한 사건들을 노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외교안보 시스템의 체질 문제는 노 대통령의 ‘자주적 외교안보’의 외침이 정권의 이념적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여기서 의사 소통을 위해 피드백이 되어 돌아와야 할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은 물론이고, 외교안보 담당부서 간의 간극도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곳곳에서 우리 외교안보가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난리들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 외교안보 시스템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국가안보회의와 국정원, 외교부, 국방부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부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외교안보의 위험 신호가 아닐 수 없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외교안보 정책은 그날그날의 사건에 대한 임기응변적 대응책에 다름아니라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시민사회의 현상이 주재국에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하고, 또 주재국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 경시되거나 무시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의사 소통 시스템으로는 그 같은 임기응변적 대응책이 기대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비틀거리는’ 외교안보 시스템의 개혁은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의사소통 시스템의 확립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조선일보 2004-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