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씨 '혹독한 핍박속에 피어난 고려인의 저력'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와 무려 한달간 기차를 타고 이동한 뒤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영하 40도의 혹한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 잡고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해야 했습니다."

1937년 9월 옛 소련 스탈린정권이 자행한 연해주 거주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정책으로 14세의 어린 나이에 카자흐스탄까지 오게됐던 윤학(尹鶴.81) 할아버지는 당시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윤 할아버지의 기구한 운명은 한일합방 당시인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도 경성 출신인 아버지와 이원 출신인 어머니는 그해 일제의 억압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뻐시에트로 이주했고 윤 할아버지는 그 곳에서 태어났다.

조선에서 이주한 동포 17가구가 오순도순 정겹게 살던 그들만의 행복은 그러나 스탈린정권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소련은 조선사람의 생김새가 일본인과 같아 전쟁수행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조선사람을 모두 일본의 스파이라고 규정하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으로 무려 25만명이나 강제이주시키게 된다.

"내 나이 14살 때인 1937년 소련군대가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쳐 사람들을 강제로 기차에 태운 뒤 무려 한달간을 달려 카자흐스탄으로 왔지요. 오는 도중 수없는 사람들이 굶어죽었고 심지어 아기를 낳다 죽은 임산부도 있었지요. 죽으면 다음역에 시신을 그냥 버린 뒤 기차는 떠났습니다. 장례식도 못치르고 떠나야 했던 가족들의 비통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이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에서 200㎞떨어진 우스톡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 무려 2천500명이 버려졌습니다. 그냥 죽으라는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토굴을 파고 움막을 짓고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인근에 사는 원주민인 카작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이 곳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서로 힘을 합쳐 집단농장을 만들어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2세들에 대해 모국어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교까지 세웠다.

그러나 소련당국은 그 다음해 학교마저 강제 폐쇄했고 "조선인들은 일본의 스파이"라며 군대에 징집을 하지 않는 대신 모두 탄광으로 보냈다.

"1942년 카자흐스탄에서 1천200㎞떨어진 까라칸이란 탄광에 고려인 등 군대마저 입대할 수 없는 소수민족들과 함께 끌려와 3년 동안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채탄 도중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 배고픔, 하루 12시간 이상 혹독한 강제노동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카자흐스탄 동포들이 거주하는 집단농장으로 돌아온 윤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을 독려해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이 농장은 최고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집단농장의 책임자로 22년간 근무하며 이익금으로 학교와 병원 등을 건설했으며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를 배척했던 소련당국으로부터 레닌훈장, 노동극기훈장, 10월혁명훈장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6년 은퇴한 윤 할아버니는 아들(알렉산드르 윤)과 함께 사업을 벌여 현재 알마티 시내에 있는 지상 3층 연면적 2천200㎡의 건물주인이 됐다.

특히 그의 아들은 타이어수입판매회사를 차려 카자흐스탄 전체 타이어 공급량의 25%를 담당하고 있으며 러시아를 비롯, 옛 소련권 국가 14개 도시에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 150여개 국가에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중앙아시아 고려인 만큼 혹독하게 핍박받은 동포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며 "88서울올림픽 당시 모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고 우리 고려인들은 비록 말과 글은 잊어버렸지만 모두 눈물을 흘리며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굿데이 2004-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