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만남을 가려낸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의 매혹
유라시아를 횡단하다

유물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증인이고 시비를 가려내는 판관이다. 그 값어치는 시간이 올라갈수록 더 높다.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 한강 하류에 위치한 서울 암사동에서 우연히 빗물에 씻겨나간 빗살무늬토기(일명 즐문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때를 전후해 우리나라의 예순 곳 넘는 데서 이런 종류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연구 결과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토기로서, 이 시대를 ‘빗살무늬 시대’라고도 한다. 그만큼 이 토기는 우리의 문명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문화유물이다.

일찍이 1920년대 북유럽의 핀란드와 스웨덴, 북부 독일, 폴란드 등지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토기가 발굴되어 핀란드의 고고학자 아일리오는 그것에 독일어 ‘캄케라믹’(kammkeramik: 빗살무늬토기)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 뒤 북방 유럽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동서쪽 광활한 지역에서도 그러한 토기가 속속 발굴됨으로써 ‘캄케라믹’은 빗살무늬토기 일반에 대한 학명으로 굳어졌다. 이 토기는 주로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위 55° 이북 지역에 하나의 문화대를 이루고 있어 일명 ‘환북극(環北極) 문화’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빗살무늬토기는 거석문화권과 채도문화권, 세석기문화권과 함께 신석시 시대 4대 문화권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었다.  

시베리아 고아시아인이 전한 신석기시대 세계문화의 꽃
“한반도 토기가 연대 더 빨라 시베리아로 역류했을 가능성도”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항아리들

빗살무늬토기란 토기의 겉면에 빗살 같은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토기를 말한다. 이러한 무늬는 여러 가닥이 난 빗살 모양의 무늬새기개로 그릇 겉면에 짤막한 줄을 누르거나 그어서 만든다. 그런데 북유럽의 토기에서 보다시피 왕왕 빗살무늬와 함께 가는 참대관이나 새뼈 같은 것으로 둥근 구멍을 찍은 무늬, 즉 타래무늬(일명 와문)가 새겨져 있어 ‘타래무늬토기’라고도 한다. 그릇 형태는 대체로 초기에는 뾰족바닥의 반달걀 모양이나 점차 깊은 바리바닥 모양으로 바뀐다. 이러한 토기는 지역에 따라 무늬나 모양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 제작 편년이 들쭉날쭉하지만, 신석기 시대의 주요 용기로서 신석기 시대가 지난 뒤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빗살무늬토기는 대체로 기원전 4천년부터 1천년 사이에 주로 산림이 우거진 강하천 주변에서 수렵과 어업을 주된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여졌다. 아직까지 이 질그릇의 발원지가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포지에 관해서는 거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어 그 교류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 분포지를 살펴보면, 북유럽의 핀란드로부터 출발하여 서북 러시아의 오카-볼가강 상류 지방을 거쳐 우랄 산맥을 넘은 다음 중부 시베리아 오브강 하류의 지류인 라핀강 유역으로 뻗어나간다. 이 분포양상은 계속 동진하여 예니세이강 중류를 지나 바이칼호에 이른다. 거기서 동남쪽으로 꺾어 몽골초원이나 헤이룽(흑룡)강을 지나 한반도로 남하하였는데, 그 여파는 일본 규슈 지방까지 파급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분포지에 관한 고찰이지 결코 유동방향은 아니다. 만약 이것을 유동방향으로 착각하면 이 토기가 서방에서 발원해 점차 동방으로 전파된 이른바 ‘서방기원설’로 오도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사와 관련해서는 더욱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초보적 연구결과들을 보면 우리의 것이 시베리아의 것보다 천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아직은 섣불리 그러한 ‘서방기원설’을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발원지나 유동경로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석기 시대에 북방의 드넓은 지역에 동서로 빗살무늬토기대가 형성되어 문명교류사의 서장을 장식했다는 사실이다.


△ 핀란드 소로유적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로 우리 토기와 무늬의 배열양상이 다르다.

우리는 이 문화대의 동쪽끝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그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북방 초원지대와 교류하고 문명을 공유했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태초부터 인류와 더불어 문명사를 엮어왔다는 극명한 증좌다. 우리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빗살무늬토기와 북방 유라시아의 빗살무늬토기 사이에 구체적으로 몇 가지 공통요소가 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우선, 무늬의 공통성과 유사성을 들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빗살무늬인데, 우리의 것은 신석기 시대 전반에 걸쳐 보편화되었으나, 유럽은 신석기 시대 토기의 제1기에만 지배적인 무늬로 나타난다. 타래무늬의 경우, 대·소타래무늬의 2종이 있는데, 유럽에서는 주로 토기 제2기에 나타나나, 한반도에서는 시기에 관계없이 골고루 나타난다. 그밖에 빗살무늬와 타래무늬를 엇바꾸는 교대배열 형식에서도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무늬가 한국 토기에서는 입 가장자리에 집중되고 있으나 유럽의 것은 배면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릇 모양에서도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에 곧은 입술의 반달걀 모양으로서, 이것은 빗살무늬토기의 원초적 형태에 해당한다. 북유럽이나 시베리아의 초기 빗살무늬토기도 거개가 이러한 형태이기는 하나, 후기에 와서 점차 바닥이 깊은 바리 모양을 띤다. 끝으로 입 가장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은 공통된 수수께끼다. 남북한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의 입 가장자리에는 구멍이 한두 개, 또는 그 이상이 비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뚫려 있다. 이러한 구멍은 북방 유라시아의 빗살무늬토기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 구멍의 쓰임새에 관해서는 뚜껑을 비끄러매거나 어디에 달아매기 위해서라느니, 장식용이라느니, 깨진 곳을 수선한 자국이라느니 등 여러 설왕설래가 있어 아직 정설은 없다.

이러한 공통성과 유사성이 바로 우리의 빗살무늬토기가 지닌 세계성이며, 이로 인해 우리 겨레는 아득한 그 옛날부터 남들과 만나고 어울려왔으며, 드디어 신석기 시대 세계적 문화권의 하나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의 의젓한 일원이 되었다. 따라서 유구한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들과의 소통을 주선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이 빗살무늬토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극히 소박하고 원시적인 이 질그릇에 의한 세계와의 첫 만남이 우리 겨레의 역사, 특히 교류사에 남긴 의미는 그만큼 오롯하다고 하겠다.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주역은 시베리아 초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고아시아인들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들에 의해 주도된 이 문화가 그들의 이동에 따라 북방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퍼졌으며, 급기야는 우리의 한반도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요컨대, 빗살무늬토기의 전파는 고아시아인들의 한반도 유입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자생 토착문화에는 북방 초원문화라는 새로운 문화요소가 가미되어 고대 우리 문화를 더욱 살찌게 했던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의 제작 연대가 상대적으로 시베리아의 그것보다 더 오랠 수도 있다는 추정은 일찍부터 찬란하게 꽃피웠던 우리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로 역류되어 빗살무늬토기 문화 전반을 더욱 빛나게 했을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에는 종종 이러한 상승적인 역교류(逆交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석기 시대에 고아시아인들과 함께 일구어놓은 빗살무늬토기 문화는 적어도 청동기 시대 이전까지 우리의 고대문화가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채도(彩陶)에서 흑도(黑陶)로,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는 중국의 토기는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중국의 중화사상이나 우리의 사대주의 유습에 일침을 놓는 질그릇의 엄정한 증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역사적 만남의 시비를 가려낸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2004-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