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후예` 고려를 다시 본다

우리 역사에서 만일 후삼국 시대가 ‘고려(高麗)’에 의해 통일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금물이지만 최근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지켜보면서 새삼 고려라는 나라나 국호의 존재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역사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고려의 존재는 중세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 동시에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논거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의 고토를 대부분 잃어버리고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 의 영유에 그친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진 불완전성을 지적하며 당시를 발해와 신라가 병존한 ‘남북국시대’로 부르자는 주장이 나름대로 힘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발해의 유민을 흡수하고 북진 정책을 통해 압록강 하류까지 영토를 확장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큰 의미를 갖는다.

최근 출간된 민현구(63)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의 ‘고려정치사 론’(고려대출판부·사진 왼쪽)과 김용선(53) 한림대 사학과 교 수의 ‘고려금석문연구’(일조각·오른쪽)는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는 고려시대를 바라보는 현단계 국내 학계의 수준을 보여주는 책이다. 민 교수와 김 교수는 각각 출신 대와 세대는 다르지만 모두 지난 2일 타계한 이기백 서강대 명예 교수와의 학문적 인연이 남달랐던 연구자이기도 하다.

진단학회장과 역사학회장을 지낸 역사학계의 중진인 민 교수는 조선초기 군제사와 함께 고려후기 정치사를 지난 40년 가까이 천착해온 연구자다. ‘고려후기정치사연구’ 출간도 앞두고 있는 민 교수는 그동안 발표한 논문 14편을 모아 엮은 이 책에서 약 500년간 존속된 고려의 역사를 통일과 독립이란 관점에서 살펴보 고 있다.

민 교수는 무엇보다 책에서 고려가 후삼국의 분립상태를 극복하고 새로운 통일국가로 대두한 뒤 동아시아 세계에서 뚜렷한 국제적 지위를 확보해 국가적 독립과 자존을 지켜나갔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신란과 몽고침입의 내우외환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축적된 국민적 일제감과 고양된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오히려 국가적 통일성과 자주적 민족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려는 오랜 대몽항쟁 끝에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국가적 독립성에 큰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 무렵 유례 드물게 독립왕국의 지체를 지킨 고려는 상당한 제약 속에서도 독자적인 국정운영을 펼쳐나갔고 끝내 반원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회복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민 교수는 최근 민족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적 민족과는 구별되지만 서구와 다른 동아시아 전근대사에서 지역, 언어, 생활양식을 매개로 하는 역사공동체로서의 민족은 일찍부터 형성됐고, 고려시대의 경우 그 실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서강대에서 이기백 교수의 지도로 석·박사학위 논문을 받은 김 용선 교수의 책은 그동안 현존하는 고려시대 묘지명 320여 개를 통해 고려시대 문벌귀족의 구성요건을 비롯해, 당시 사회사를 해 명한 11편의 글을 모은 것이다. ‘고려귀족의 결혼·출산과 수명 ’ ‘고려 지배층의 매장지에 대한 고찰’ 등 당시 묘지명 자료를 정리하면서 새롭게 밝혀낸 내용들이 흥미를 끈다.

(문화일보 2004-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