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들의 '한숨'

지난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이종석 사무처장 체제로 개편된 후, 외교통상부에서는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외교관들은 이에 대한 반응을 취재하는 기자에게 한숨을 내쉬거나,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하지만 외교부 내부에는 현 정부 들어 외교부의 힘이 많이 약화된 가운데, 이 처장이 안보회의의 명실상부한 실세가 됨으로써, 그의 독주(獨走)가 가속화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특히 주한미군 감축논의로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미국에 ‘자주파의 리더’로 인식돼 있는 이종석씨의 위상 강화를 미국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관찰 중이다. 일부 외교관들은 이 처장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대신, 주한미군 감축협상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리처드 롤리스 아태담당 부차관보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 우려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롤리스 부차관보는 1970년대 한국에서 미국중앙정보부(CIA) 요원으로 근무한 이후 30년간 미국의 대(對)한반도 전략에 관여해 왔다. 확인된 그의 방한 기록만 300여차례이다. 우리말 이해 능력도 상당한 수준이다.

지난해 초 미 2사단의 한강 이남 조기 재배치 입장을 통보한 것도 롤리스 부차관보였다. 북핵위기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주한미군 감축협상에 참가하는 사실 자체가 우리측에 부담이다.

한 외교관은 “미군 감축이라는 한·미 간의 최대 현안을 앞에 두고, 미국은 널리 알려진 한국 전문가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우리는 북한문제 전문가를 컨트롤 타워로 중용(重用)했다”고 말했다. 정책 결정 파워 게임에서 밀릴 것을 우려한 외교부 일각의 넋두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의 명운이 걸린 문제를 둘러싸고 감도는 정부 내의 이 같은 분위기는 걱정스런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조선일보 2004-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