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호령한 고구려魂 ‘생생’

■ 인하대 학술조사단 동행취재

지난달 26일 본보 취재팀과 인하대 학술조사단이 고선지 장군의 발자취를 탐사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에서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어 자동차로 약 5시간을 달리자 무성한 풀과 가시나무로 덮인 광활한 평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751년 동서양의 연합군대가 최초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 대평원이다.

동서교통의 요지로 알려진 탈라스강의 상류에 펼쳐진 대평원에는 탈라스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이 묻힌 200여기의 쿠르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쿠르간은 현지어로 평원에 있는 무덤을 가리키는 말.

길이가 11∼13m인 긴 타원형의 쿠르간은 고구려 초기 무덤인 적석총과 비슷하게 무덤 주변이 돌로 쌓여 있었다. 한 무덤에 많게는 100여구의 유골이 묻혔다는 현지인의 설명을 통해 탈라스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탈라스 마나스박물관의 에밀 나르보다예프 연구원(37)은 “당시 전투에서 이긴 이슬람군이 자국의 전사자와 당나라의 전사자를 함께 쿠르간에 묻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투가 한여름(7월)에 벌어졌기 때문에 시신을 방치하면 질병이 돌 우려가 있어 대부분 태우고 일부만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군사를 주축으로 한 사라센 연합군 30만명과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 7만명이 5일간 치열하게 벌였던 탈라스 전투.

이 싸움에서 당나라는 함께 참전했던 돌궐 계열 카를루크족의 반란으로 패배해 무려 5만명이 전사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고선지 장군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패장이 되어 귀환한다.

고선지 장군이 비록 패하긴 했지만 탈라스 전투는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당나라는 중앙아시아를 이슬람국가에 내줬으며 중국은 지금까지 이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또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군사들이 제지술, 화약제조술, 나침판 등을 서역에 전파하게 되고 이는 다시 유럽에 알려져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된다.

특히 제지술의 전파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게 번역 보급되는 계기가 된다.

나르보다예프 연구원은 “탈라스 전투 하면 고선지 장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며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곳을 그동안 학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기록한 것은 잘못으로 키르기스스탄에 속해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마나스박물관은 탈라스 전투에서 싸운 당나라 군사들의 투구와 장검(長劍), 화살촉, 갑주 등을 처음 발굴해 보관하고 있다.

고선지 장군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도 깊은 역사의 흔적을 새겨 놓았다.

신구 당서(唐書)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위치한 석국(石國·현 타슈켄트)이 당나라와의 유대를 끊고 이슬람 세력과 손을 잡자 당은 고선지 장군에게 석국을 정벌하도록 했다.

이에 고선지 장군은 탈라스 전투 1년 전인 750년 12월 그의 4차 서역정벌을 통해 석국 일대를 정벌한다.

현재 타슈켄트 동남쪽 마베르나흐 거리에 위치한 민우르크성(城)터가 고선지 장군에 의해 잿더미로 변한 석국의 왕도(王都)이다.

타슈켄트 국립역사박물관 미나샹츠 바즈겐 선임연구원(55)은 “지금은 잡초만이 무성한 채 도심 한복판에 방치돼 있는 성터 곳곳에는 당시 불에 그슬린 자국이 아직도 생생하고 성터를 조금만 파도 뼈와 토기 조각 등이 쏟아져 나온다”고 말했다.

고선지 장군은 740년 톈산(天山)산맥 서쪽의 달해부(達奚部) 정복을 시작으로 1차 실크로드 정벌에 나섰다. 당은 이에 앞서 한족 출신의 장군을 앞세워 세 차례나 서역원정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하자 고선지 장군을 선택한 것.

고선지 장군은 1차 서역정벌에 성공함으로써 실크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떠오른다.

특히 747년 2차 정벌 때는 1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고원(4600m)을 넘어 현재 파키스탄의 길기트(당시 소발률국)를 정벌한다. 이때 인근 72개국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다시 750년 3월 현재 사마르칸트인 갈사국((걸,흘)師國)과 그해 12월 석국을 각각 정벌하면서 실크로드의 실질적인 패주로 동서양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 고선지 장군은 누구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高仙芝·?∼755)는 중국사뿐 아니라 서양문명사 발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중국 장군이라는 이유로, 중국에서는 고구려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과 서구에서 먼저 연구가 이뤄졌다.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간 유민 2세. 사라진 고국 대신 낯선 땅에서 살아야 했다.

당나라는 세 차례에 걸친 서역 정벌에 실패하자 20세 때 장군에 올라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인 그에게 서역 정벌의 임무를 맡긴다.

747년 파미르고원(해발 4600m)을 넘어 현재 파키스탄의 길기트(당시 소발률국)를 정벌한 뒤 당나라 최서방 군진(軍陣)인 안서도호부로 돌아왔을 때 그가 들은 말은 “개똥같은 고구려 놈”이란 욕설이었다. 당나라 군부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네 차례의 서역 원정에 성공해 당시 동쪽의 당나라와 서쪽의 지중해를 잇던 실크로드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그는 한족이 이루지 못한 서역 정벌이란 위대한 업적을 이뤘지만 안녹산의 난 때 모함을 당해 참형을 당한다.

영국의 고고학자로 파미르고원을 세 차례 답사한 스타인경은 고선지 장군이 파미르고원을 넘은 것은 나폴레옹이 18세기 알프스산맥을 넘은 것보다 더 위대한 전사(戰史)로 평가했다.

■ 인하대 박물관 윤용구 학예실장

“한민족 뿌리 연구 日에 뒤져 충격”

“학술조사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한반도가 7, 8세기에 초원길을 통해 활발히 왕래한 사실을 확인한 것은 큰 성과입니다.”

인하대 중앙아시아 학술조사단을 이끈 인하대 박물관 윤용구(尹龍九·42·사진) 학예실장은 “중앙아시아가 한반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만큼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지안(集安)에 남아 있는 고구려 벽화 고분에 소그드인(7, 8세기 중앙아시아 상인)이 등장하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에서 출토된 사신도에 고구려 사신이 그려져 있는 것은 동서간에 문명이 얼마나 활발하게 교류됐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특히 이번 조사를 통해 아프라시압 사신도에 그려진 사신이 고구려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벽화의 제작연도를 알아낸 것은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지 박물관 관계자 및 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국내의 연구가 매우 부실하다는 것을 알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고선지 장군에 대한 조사를 위해 만난 탈라스 박물관 관계자로부터 일본 NHK방송국이 학자들과 함께 이곳을 수차례 방문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어요. 사실 일본은 탈라스와 관련이 없는데 말이죠.”

윤 실장은 탈라스 시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탈라스 전투 당시 숨진 사람들의 무덤에 대한 발굴 작업을 멈춘 것과 관련해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또 국가 이미지를 제고한다는 차원에서 우리 정부가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 2004-6-7)